- 신도 늘자 봉황각에서 본격 준비
- 대교당 신축자금 모아 밑천 마련
- 민족대표 33인 선언 전국에 전파
- 임시정부 수립·헌법 제정 기반돼
우리는 지금 3·1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00년 전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이 한반도에 울려 펴졌다. 해외동포에게도 퍼져 나갔다. 이 만세 소리는 중국과 인도 등 제국주의 지배에 신음하던 피압박 민족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1910년 8월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조선을 총칼로 지배했다. 조선 민족은 노예 취급을 당했고 이 땅 전체가 감옥이나 다름없었으며 일제의 수탈대상이었다. ‘대한독립 만세’ 소리는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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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역에서 3·1절 기념 행사를 열고 있는 천도교인들. 심국보 제공 |
천도교 제3세 교조 손병희 선생은 일제 강제 병합이 발표되자 천도교중앙총부 조회 석상에서 “내 반드시 10년 안에 주권 회복을 이루어 놓으리라”고 하시며 독립운동의 선두에 나설 것을 천명했다. 눈엣가시 같은 손병희 선생에 대해 일제는 ‘사이비 교주’ 등 갖은 음해를 일삼았지만, 경술국치 이후 천도교 신도 수는 급증했다.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신도가 날마다 증가하여 300만을 헤아린다. 그 발전의 신속함은 거의 고금의 종교계에 일찍 없는 일”(‘한국독립운동지혈사’ 중)이라 하였다. 나라 잃은 민중에게 천도교는 마음의 의지처였다. 100년 전 천도교는 전국 37개 대교구와 190여 개 교구, 300만의 교인을 가진 우리나라 최대 종단이었다. 교세가 커지자 손병희 선생은 북한산에 수련도장 ‘봉황각’을 세웠다. 1912~1914년 7차에 걸쳐 전국 각지 483명이 봉황각의 수련회에 참석했다. 겉으로는 기도회요, 수련회였으나 독립운동 준비였다. 봉황각은 3·1운동 발상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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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 |
천도교는 국권 상실 이후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독립선언서 인쇄를 맡았던 이종일과 보성사 사원들은 1913년 이후 비밀결사체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와 ‘천도구국단’을 만들어 민중 봉기를 계획했다. 천도구국단 명예총재는 손병희, 단장 이종일, 총무는 보성사 직원 장효근이 맡았고, 독립의군부에 군자금을 대고 장총과 실탄도 샀다.
1918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됐다. 손병희 선생은 독립운동 시기가 왔음을 직감했다. 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1918년 4월 4일 대교당을 신축하기로 하고, 건축헌금을 교호당 10원을 납부하도록 했다. 100여만 원이라는 거금이 모였다. 1918년 가을 종로 경운동에 교당 건축을 시작해 1921년 2월 완공했다. 대교당 건축비 27만 원을 제외한 대부분 성금이 3·1운동과 독립운동 군자금에 쓰였다. 3·1거사 때 기독교 측의 경비 5000원, 김규식의 파리 파견 경비 3만 원 등도 천도교에서 부담했다. 자금 조달은 3·1운동 과정에서 천도교의 중요한 공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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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 제3세 교조 손병희 선생. |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1월 파리에 세계 정상이 모여 강화조약을 맺는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천도교는 전국 교구에 1919년 1월 5일부터 49일 특별수련을 지시하고, 만세 운동에 대비했다. 민족 대표 33인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장로교 7인·감리교 9인), 불교 2인으로 구성됐다. 3월 1일 오후 1시, 손병희 선생은 태화관에 도착했다. 오후 2시 독립선언식이 열렸고 탑골공원에서 시위가 시작되자 순식간에 사람이 몰려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전국으로 파급됐다.
전국 어디든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학생이 중심을 이루었고 상인, 농민, 기생과 백정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만주의 서간도와 북간도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벌어졌고, 연해주와 미국 멕시코 등에서도 전개됐다. 만세운동으로 일제에 맞선 7700여 명이 학살됐고 4만6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3·1운동이 전개되자 민족 지도자들은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헌법을 제정했다. 헌법은 3·1정신 계승을 분명히 했다. 이를 이어받아 대한민국이 수립됐다. ‘의암 손병희 평전’의 저자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기미년 3·1운동은 의암의 존재가 아니었으면 가능했을까 할 만큼 선생은 인격, 신앙심, 리더십, 인력 동원과 자금 지원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의암 손병희 선생과 천도교는 기획하고 사람을 엮어내고 자금을 대는 등 3·1운동의 기획·연출자였다. 3·1운동은 과거가 아니다. 2016~17년 겨울 ‘촛불’들이 외친 함성은 3·1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며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탁암 신국보·천도교 ‘신인간’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