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순천 작은 아버지 윤이냐시오의 청년시절 흑백사진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내가 성년이 되었을 때, 작은 아버지께서 사진 몇 장을 건네시며 보정을 부탁하셨다. 그 속에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채, 중절모를 쓰고 롱코트로 한껏 멋을 낸 훤칠하고 중후한 청년이 있었다. 이 분이 누구신지 어머니께 물었다. "이 사진이 아직도 있었네. 스무살 조금 넘은 작은 아버지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키가 너만 하고 잘 생기셨지"라고 하시며 한참 들여다보셨다.
어린 내가 기억하는 한, 작은 아버지는 늘 침대에 눕거나 앉아계셨다. 이따금 성당에 가실 때 침대에서 휠체어로 몸을 옮기셨다. 불편하시겠구나 하는 정도였지 이상하거나 괴이한 모습은 아니었다. 새벽에 홀로 일어나 초를 켜고 성서를 보시며 기도하시고, 갓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바둑을 가르치시고, 별로 우습지 않은 이야기에도 유쾌하게 웃으시고, 밥상을 내놓는 숙모에게 애매하게 애정을 표현하시고, 침대에 앉아 시계를 수리하시고, 그리고 멋진 모자를 쓰고 휠체어에 앉아 성당에 다녀오마 하시며 미소 지으시던 분이셨을 뿐이다.
사춘기 시절, 불안과 막막함이 밀려들면 혼자 순천으로 가서 골방으로 숨어들었다. 작은 아버지 집은 피난처였고 안식처였다. 그곳에서 가난의 성자인 아씨시의 프란체스코를 알게 되었고, 차별과 배제를 넘어서는 관용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조화롭게 사는 데 필요한 감수성과 불편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좀 더 편히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고민의 싹을 키웠다. 그런 정서적 유산이 기억의 전부여서 왜 몸이 불편한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사진을 화면에 띄워보니 살짝 웃는 미소가 작은 아버지와 영락없이 닮은 청년이었다. 어줍잖은 솜씨로 보정하고 인쇄해서 갖다드렸다. 돌아오는 버스에서야 사연이 궁금해져 아버지께 여쭈었다. 한참 뜸 들이다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조각해내셨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매일 배를 곯던 육남매 중 삼형제가 10대 때 출가하여 고생을 거듭했으며, 손재주가 좋던 작은 아버지가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심하게 다쳤으나 수중에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고 그 이후 장애를 안고 살아간 이야기가 줄줄 나왔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소천하셨고, 나는 박사학위를 받았다.
곧 장애인의 날이다. 장애인을 이해하자는 행사들이 펼쳐질 터이고, 언론에는 요란한 사진들과 사연들이 오를 터이다. 누구누구가 장애인을 위해 뜻깊은 일을 했다 칭송할 터이고, 세월호도 기억 못하면서 장애인의 애환을 기억하자 할 터이다. 반짝 행사가 반갑지 않으나 언감생심 그것을 싫어할 수 있을까?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구분과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요란한 행사를 치러내는 호들갑이 아니라, 사회와 사람 속 깊숙이 관용을 스며들게 하는 정서적 유산이 아닐까? 하루 빨리 장애인의 날이 필요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윤성호 동서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