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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송자 스님이 평생 머물렀던 전남 순천 송광사. 그는 초의 선사의 '동다송'을 좋아해 차를 달일 때마다 동다송 시구절을 외었다. |
- 두 사람 다선으로 맺은 40년 우정
- 빨리 차 보내달라고 보채는
- 추사 편지엔 익살러스움까지
- 유배 때도 '차 타령' 그칠 줄 몰라
- 초의 잇는 다인은 금명 선사
- 송광사 머물며 1100여 한시 남겨
- 동다송에 빠져 살았다는 그는
- 스님들 사이 '다송자'로 불려
- 본찰 10분 거리 감로암엔
- 지금도 일부 야생차밭 남아
초의(草衣·1786~1866) 선사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두 사람은 '지음(知音)'이란 고사에 딱 어울리는 우정을 나눴다. 초의의 다선(茶禪)을 추사 만큼 잘 이해한 이도 없을 것이다. 초의가 우리 차문화의 중흥조로 성장하는 데도 추사의 영향이 지대했다. 1815년 두 사람이 만난 뒤 추사가 타계할 때까지 40여 년의 세월 동안 조선에는 '다선 르네상스'가 펼쳐졌다.
초의가 입적하기 5년 전 걸출한 차인 한 명이 또 태어났다. 금명(錦溟·1861~1930) 선사다. 그는 출가 후 줄곧 우리나라 차의 대표 사찰 중 하나인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지내며 차시 80여 수를 비롯해 1100여 수의 한시를 남긴 빼어난 시인이기도 하다. 금명은 '차를 달이면서 늘 동다송을 외운다(煎茶常誦東茶頌·전다상송동다송)'는 시를 쓸 정도로 동다송에 빠져 살았다. 그는 동다송을 직접 필사해 후세에 전하기도 했다.
초의가 뿌린 우리 차문화의 씨앗은 140여 년이 흐르면서 이처럼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이름하여 '초의 다맥'이다. 그 세계로 들어가 보자.
■"차 빨리 보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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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 김정희 |
초의가 동다송을 집필한 일지암이 있는 해남 대흥사에는 추사의 흔적이 적잖다. 추사가 초의에게 써준 '일로향실(一爐香室)' 편액 글씨를 비롯해 서예 작품만 세 점이 남아 있다. 지난달 30일 대흥사 성보박물관에서 '일로향실' 글씨를 보는 순간 단아하고 고졸한 필선이 뿜어내는 매력에 빨려들었다. 선적 깨달음의 경지가 이런 것일까. 추사는 차와 물과 불이 중용을 이뤄 다신(茶神·최상의 차)이 우러난 상태를 글씨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초의의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닮은 글씨였다.
차를 매개로 한 초의와 추사의 우정은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50여 통의 편지에서 오롯이 드러난다. 편지 중 차와 관련된 것이 15통가량 된다. 차에 대한 품평이나 다선을 논한 것도 있지만 차를 보내달라는 걸명(乞茗) 편지가 많다. 걸명 편지를 보노라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새 차는 어찌하여 돌샘과 솔바람 사이에서 혼자만 마시면서 애당초 먼 데 있는 사람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요? 몽둥이 삼십 방을 아프게 맞아야겠구려'. 차를 보내지 않는다고 중국의 유명한 선승 덕산이 제자들에게 선을 가르칠 때 사용한 몽둥이(德山棒·덕산봉)로 때리겠다는 대목에선 동심으로 돌아가 우정을 나누는 추사와 초의의 모습이 그려진다.
추사는 제주도로 유배를 가면서도 초의에게 "배냇향 나는 맛좋은 차 달라고 보채는 사람 멀리멀리 떠나가 버리니 이제 초의당 혼자서 그 향기로운 차 다 마시겠네"라고 밉지 않은 푸념을 늘어놓았다. 두 사람은 동갑이었지만 남에 대한 배려심이 깊은 초의가 늘 추사를 감싸고 위로했다. 편지에서 보듯 논쟁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의 추사는 초의에게 이따금 떼를 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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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희가
초의에게 써준
'일로향실' 편액 글씨. |
'차 시절은 아직 이른 게요? 아니면 이미 따기 시작하였소? 몹시 기다리고 있다오. '일로향실' 편액은 마땅히 적절한 인편을 찾아서 보내겠소. 금년에는 차를 만든 뒤에 반드시 무더울 때는 보내지 말고 가을에 서늘해지기를 기다려 보내는 것이 좋겠소. 항아리에 넣을 때는 단단히 싸서 보내도록 하시구려'. 위리안치 처지였던 제주 유배지에서도 '차 타령'은 여전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선적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고요히 앉아 있노라면/차를 반쯤 마셔도 향기는 처음 그대로네/만물은 오묘히 돌아간다/물 흐르듯 꽃 피듯(靜坐處 茶半香初 妙用時 水流花開·정좌처 다반향초 모용시 수류화개)'. 추사의 선시(禪詩)가 이를 보여준다.
■차 달이며 동다송 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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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광사 비림에 있는 다송자 스님의 비석(가운데). |
금명 선사는 절집에서는 '다송자(茶松子)'로 불렸다. '다송'은 그의 자인데, 스님들이 그를 존경하는 뜻에서 '자' 자를 붙인 것이다. 금명은 동다송을 필사해 묶어내면서 제목을 '백열록(柏悅錄)'이라 붙였다. '백열'은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松茂栢悅·송무백열)'는 사자성어를 줄인 것으로, 남이 잘 되는 것을 기뻐한다는 말이다.
지난달 31일 오전, 다송자의 자취를 찾아 송광사에 갔지만 2001년 그의 이름을 따 개원한 '다송원(茶松苑)'이란 찻집과 비림에서 그의 비석(화엄강주금명당대종사비명)만 확인했다. 하안거 결제 중이라 그의 영정을 모셔 둔 영정각과 백열록 등 그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서고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 송광사 본찰에서 10분 거리의 조계산 자락에 있는 '감로암(甘露庵)'에서 조금이나마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단 이슬'이란 뜻의 암자 이름에서 감지할 수 있듯, 감로암의 물맛은 좋았다. 달짝지근하게 혀를 감돌다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게 찻물로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암자 앞에는 야생 상태의 차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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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광사 감로암 앞에 있는 야생차밭. |
암자의 젊은 스님에게 물었더니 "소량이지만 찻잎을 따 차를 만들어 마시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입적한 지 80여 년이 지나서인지, 그는 금명을 알지 못했다. '무소유' 법정 스님이 생전에 주석했던 불일암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감로암의 절집은 세속의 여염집처럼 소박했지만 역사는 깊었다. 불교가 승했던 고려 시대 '스님 고시'에서 장원급제한 원감국사가 감로의 법을 펼치기 위해 창건한 절이라고 했다. 금명은 여기서 찻잎을 따서 덖고 말려 만든 차를 감로수에 우려내 마시며 인생과 존재에 대해 사유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시에서 이런 상상은 현실성을 얻는다. '아침 비 마치니 사립문 밀치고/차밭을 물어 대숲으로 향하네/찻잎은 햇살 아래 반짝이고/아이들 벗 부르니 황혼은 짙어가네'. '스님네가 찾아와서 조주 문을 두르리니/차 이름(茶松) 부끄러워 뒤뜰로 모시네'. '거울 속 빛과 소리 천 년이 숨어 있고/그림 속 강산은 점점이 푸르다/백척난간에 바람이 머무는데/한잔 뇌소차에 꿈을 깨는구나'. 그의 주옥같은 시구절들은 영혼을 정화하는 여과지로 다가온다. '문 앞에 주렴을 드리웠건만/털끝마다 맺힌 피, 벼린 주둥이로 배 채워/졸개들은 늘어져서 한잔 차를 마시네'. 모기의 흡혈을 한잔 차에 비유한 시구에 이르러선, 그 도저한 차 사랑, 생명 존중에 고개가 숙여진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함께 차를 마시고, 그리하여 차는 생명으로 승화함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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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로암의 약수. 물맛이 좋아 찻물로 그만이다. |
금명의 고향인 곡성 태안사에는 그의 호방한 인간미 어린 자취가 남아 있다. 1918년, 그는 태안사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한 데 이어 3년 뒤 환갑이 되던 날, 제자들과 다회를 열고 시집 한 권을 묶어낸다. '도는 태양과 같아 번뇌마장을 녹이고/찻잔은 삼태기와 같아 마음 먼지를 쓸어내나니'. 초의와 추사가 그랬듯, 금명의 다선은 자신을 비워 자연으로 돌아가는 한잔 차였다.
# '다약설'에 기록된 차의 유익함
- 사경 헤매던 초의 제자, 냉차 넉잔에 기운 차려
우리 차가 몸에 좋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얼마나 좋을까?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례가 있다.
초의 선사의 제자인 범해(梵海·1820~1896) 스님이 직접 경험한 사례다. 범해는 '동사열전(東師列傳)'을 지은 학승이다. 1852년 대흥사 남암에 머물던 범해는 이질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병은 깊어만 가고 보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스스로 죽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냉차(冷茶)로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계시던 어머니를 구했으니, 급히 달여서 써보기로 하세." 사제의 와병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형 무위 스님이 범해의 살길을 열었다.
'차를 달여 한 잔 마시니 뱃속이 조금 가라앉았다. 두 잔을 마시니 정신이 상쾌해졌다. 석 잔 넉 잔을 마시자 전신에서 땀이 흐르고, 맑은 바람이 뼛속까지 부는 듯 상쾌하여, 마치 애초에 병이 없었던 사람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는 것이 점차 나아져서 기운을 차리는 것이 날마다 좋아졌다.'
범해는 자신의 저서 '다약설(茶藥說)'에 이 같은 경험담을 기록해 놓았다. 초의에서 시작된 우리 차문화가 중흥의 뿌리를 내리게 된 데는 이처럼 몸소 겪어 얻은 우리 차의 유익함에 대한 확신이 동인으로 작용했다. '차는 땅에 있고, 사람은 하늘에 있으니, 하늘과 땅이 감응한 것인가?' 범해는 자신의 쾌유를 천지조화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