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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대흥사 뒤 조계산 자락에 자리 잡은 일지암. 초의 선사는 이곳에서 반평생을 지내며 우리 차문화의 기초를 확립한 불후의 명저 '동다송'을 저술했다. |
- 선사가 반평생 머문 초가 한 칸 일지암
- '풀옷' 법명에 걸맞은 무욕의 삶 오롯이
- 이곳에서 '초의선' 등 수많은 명저 남겨
- 추사 김정희 부친이 잠시 들렀다가
- 소락보다 좋다 극찬한 유천의 물맛
- 맛있는 차 만들어낸 원천임을 실감
- 암자 옆 산자락에 심어 가꿨던 차나무
- 지금은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아
- 겨우 잡풀에 섞인 몇 그루 발견 씁쓸
불지옥이란 게 이런 것일까. 평소 햇볕의 은혜를 잊고 산 죄를 단단히 징치하겠다는 듯, 천지를 집어삼키는 폭염 아래 숨이 턱턱 막히고 의식마저 가물거린다. 제아무리 성능 좋은 냉방기구라 한들 염천을 식히진 못할뿐더러 열섬의 도시 속에 우리를 가두는 부작용도 부른다. 인공적 피서 수단의 한계를 절감할수록 대숲에 일렁이는 한 줄기 청량한 바람이 간절해진다. 무더위에 허물어진 나약한 정신을 번쩍 깨우는 죽비 같은 바람이면 더할 나위 없을 터. 납량 묘책을 찾아 이리저리 자료를 뒤지던 중 눈길 끄는 글귀를 발견했다.
'대숲 소리 솔바람 소리 모두 서늘하니/맑고 찬 기운 뼈에 스며 영혼을 일깨우네(竹籟松濤俱蕭凉·죽뢰송도구소량/淸寒瑩骨心肝惺·청한영골심간성)'. 우리 차문화의 중흥조인 초의(草衣·1786~1866년) 선사가 지은 '동다송(東茶頌)'의 한 구절이다. '대숲 소리 솔바람 소리'를 '찻물 끓는 소리'에 비유한 표현이다. 찻물 끓는 소리가 어떠하기에 맑고 찬 기운이 뼈에 스밀 정도로 서늘한가? 이런 경지를 터득한 인물이라면 폭염에 포획된 찌든 일상을 일거에 날려버릴 삶의 지혜를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 바랑' 하나 메고 '초의 찾기' 여행에 나섰다.
■나뭇가지 하나로도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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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지암 올라가는 길. |
지난달 30일 찾은 전남 해남 두륜산 대흥사의 일지암(一枝庵)은 고요하고 정갈했다. 초의 선사가 입적한 뒤 불에 타 사라졌던 일지암은 초가 한 칸, 기와집 한 칸 등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선사는 39세 되던 해인 1824년 이 암자를 지은 뒤 입적할 때까지 반평생을 이곳에서 머물며 우리 차문화의 기초를 확립한 고전 '동다송'과 조선 후기 선 사상의 주요 저작인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비롯한 많은 명저를 남겼다. '초의차' '초의선'의 산실인 셈이다.
일지암이란 암자 이름에서부터 선사의 무욕한 삶의 자세가 드러난다. '언제나 저 뱁새를 생각하노니/한 가지(一枝)만 있어도 몸 편하다네'라는 중국 당나라 선승 한산의 시구에서 암자 이름을 따왔다. '연못을 파니 허공 중의 달이 훤하게 담기고/마음의 낚싯대 드리우니 까마득히 구름 샘에 닿는구나/눈을 가리는 꽃가지 잘라내니/석양 하늘에 아름다운 산이 저리도 많았던가'. 선사가 암자를 짓고 난 뒤 지은 시에서도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인생관이 오롯하다. 자신을 비우고 외물(자연)을 온전히 받아들여 공존하는 삶이다. 선사의 그런 자취가 녹아있어서인지, 일지암 마당에 서니 장봉 북산 용암 응산 성암 등 두류산의 모든 봉우리와 암자는 물론 멀리 달마산까지 정겹게 다가왔다.
'풀옷'이란 뜻의 법호에도 선사의 무소유 수행관이 깃들어 있다. 이 법호는 고려조 야운 선사의 '자경문' 중 '나무뿌리와 과실로 주린 창자를 달래고/솔잎과 풀옷으로 벌거숭이 알몸을 가린다'는 글귀에서 인용했다는 설이 있다. 선사의 무소유 수행은 만년으로 갈수록 강도를 더했다. 선사의 제자 범해 각안이 쓴 '동사열전(東師列傳)'에 이런 모습이 기록돼 있다. 선사는 입적하기 한 해 전 일지암에서 토굴(용마암)로 옮겼다가 다시 움막(쾌년각)으로 이거해 삶을 마감했다.
선사는 시·그림·글씨에 능한 삼절(三絶)이었다. 이뿐 아니라 탱화와 단청, 범패, 바라춤에도 빼어난 능력을 발휘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 선승이었다. 추사 김정희와 지음(知音)으로 지낸 것은 이런 가치관과 인생관이 공감대를 형성한 때문일 것이다.
■진수 흐르는 유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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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지암 뒤 '유천'. |
초의 선사의 '가지 하나' 인생관이 구석구석 배어든 일지암은 그래서 향기로웠다. 진도 사람 속우당은 대둔사초암서(大芚寺草菴序)에서 이를 증언한다. "부지런하고 정성스럽지 않음이 없다. 과수원은 뒤쪽에 가꾸고 채마밭은 앞에다 만들었다. 맑은 물 한 줄기가 바위 사이로 솟아 채마밭 앞으로 남실남실 흘러나온다. 채마밭 곁에 연못 하나를 파서 물길을 이끌어 아래로 흐르게 하니 차고도 맑은 품이 금곡(金谷)만 못지않다. 못 위에는 나무 시렁을 설치해서 몇 그루 포도 넝쿨이 그 위를 덮고 있다. 양옆의 흙 계단에는 기화이초를 심어 봄빛을 희롱하니 마치 속세 사람을 비웃는 듯하다.…서암에 구름이 걷히고, 동산에 해가 나서 더운 기운이 사람에게 끼쳐오면 가사를 벗고 경전을 덮는다. 정정한 늙은 스님은 왼손에 든 노란 풀잎 부채를 천천히 부치면서 오른손으로는 벽오동 지팡이를 짚고서 아름다운 풍광 사이를 소요한다. 인간 세상에서 뜻을 기름은 비록 선경이라 해도 이보다 더 낫지는 못할 것이다."
특히 일지암의 물맛은 각별했다. 초가 뒤편에 크기가 다른 물받이 돌 3개를 놓고 반으로 쪼갠 대나무를 연결해 물이 흐르게 해놓은 '유천(乳泉)'의 물맛은 어머니 젖처럼 다디달았다.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일지암에 들러 유천의 물맛을 보고는 "소락(酥酪)보다 더 좋다"고 극찬했다. 유천의 좋은 물은 맛있는 차를 우려내는 원천이 됐다. 선사는 동다송 주석에서 '차는 물의 신(정신)이요, 물은 차의 몸이니, 진수(眞水)가 아니면 차신(茶神)을 드러낼 수 없고, 진차(眞茶)가 아니면 수체(水體)를 나타낼 수 없다'고 했다.
일지암의 원래 출입문이 있었던 곳에는 현재 옛날처럼 사립문이 세워져 있다. 선사를 만나러 온 추사가 사립문 앞에서 "초의, 계신가? 내가 왔네"라고 소리칠 것만 같았다.
■차 한 방울이 땀 한 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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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지암 내 살림집 '자우홍련결사'. |
초의 선사의 '다선일미(茶禪一味·차와 선은 하나)' 사상의 바탕에는 '농선(農禪) 병행 정신'이 깔려 있다. 선사는 암자 옆 산자락에 차나무를 심어 가꿨다. 매년 입하(立夏) 전후면 직접 찻잎을 따서 덖고 말리고 비벼 차를 만든 뒤 자신도 먹고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차나무를 키우고 차를 만들어 마시는 모든 과정을 선 수행(다선일미)의 일환으로 여긴 데다, 자신의 호사를 위해 남을 '노동 지옥'으로 몰아넣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질의 차를 생산하려면 강도 높은 노동이 일정 기간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어야 해 동원되는 일꾼들이 골병들기에 십상인 게 차 재배 현장의 현실이다.
지배층의 차 마시기가 일반화해 차 수요가 증가하면서 피지배 농민의 차 생산 노동량과 강도도 비례적으로 늘어나고 세졌다. 관아에서는 차를 사고파는 다소(茶所) 주변 농민을 징발해 차 생산 노역을 시켰다. 당연히 농민의 원성이 높아졌고, 차나무는 공격 표적이 되었다. '관에서는 노인과 어린이 징발하여/험준한 산골짜기에서 간신히 따 모아/머나먼 한양으로 등짐져 나른다네/이는 백성의 애끓는 피와 땀이니/내 시의 은밀한 뜻 부디 기억나/차밭 모두 불살라 차의 공납 금하면/남녘 백성들 편히 쉬는 것 이로써 시작되리'. 고려조 대문장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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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의선사 초상 |
일지암을 둘러본 뒤 주변에서 차밭을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차 문화의 중흥조를 낳은 사찰에 차밭이 없다니! 대흥사로 내려오는 길에 만난 한 스님에게 까닭을 물었다. "초의 큰스님이 살아계실 때 차나무를 많이 재배했을 것으로 보여 대흥사 주변 산자락을 조사해봤지만 규모 있는 차밭은 찾지 못했다. 거의 자연 상태로 방치된 곳이 일부 있을 뿐이다. 당시 (지배층의) 차 공납 요구가 늘어나면서 노동 부하가 커져 극심한 몸살을 앓던 농민과 승려들이 견디다 못해 차나무를 없앤 게 아닌가 생각된다." 스님은 근래 차나무 재배에 신경을 쏟고 차도 생산하고 있다는 희망적인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경내 찻집과 스님들에게 물어 관음암과 진불암 가는 길섶에서 겨우 발견한 차밭은 잡풀이 뒤덮여 차나무를 식별하기 어려웠다. 쑥대밭이나 다름없었다. 씁쓸한 기억을 뒤로하고 초의 선사가 거쳐 간 다음 여행지인 경남 하동 칠불사로 발길을 옮겼다.
초의 선사 연보 |
1786년 |
전남 무안군 삼향면서 출생. 속성은 장 씨, 본관은 흥성. |
1790년 |
강에서 놀다 깊은 물에 빠져 가까스로 구조. |
1800년 |
나주군 다도면 운흥사서 벽봉 스님에 의지해 출가. |
1804년 |
영암 월출산에 올라 바다서 떠오르는 달을 보다 크게 깨달음. 해남 대흥사서 완호 스님을 은사로 구족계. 초의 법호 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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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 |
강진 다산초당서 정약용 만남. |
1812년 |
다산과 월출산 유람. |
1815년 |
상경해 정학연 학유 형제, 김명희 상희 형제 등 유학자들과 교유. |
1824년 |
일지암 건축. |
1828년 |
경남 하동 칠불암서 중국 청나라 모문환이 엮은 '만보전서' 중 '채다론' 베껴 '다신론' 편찬. |
1831년 |
초의시고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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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년 |
소치 허유 제자로 들어옴. |
1837년 |
동다송 저술. |
1838년 |
금강산 유람. |
1840년 |
헌종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란 호 받음. |
1856년 |
지음 추사 김정희 별세. |
1866년 |
입적. 세수 81세, 법랍 6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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