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치국물 대신 곰피 불려 낸 진액에
- 꼬치고기 우린 물 섞어 육수 완성
- 3년 숙성 된장·간장으로 감칠맛 더해
- 함경도 출신 시어머니 손맛 물려받아
- '영도 향토음식' 지역성 제대로 살려
지방자치단체나 기업 등에서 지역과 상품을 홍보하기 위해 '스토리텔링'을 활용하는 경우가 잦다. 그런데 스토리와 스토리텔링을 혼동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스토리는 말 그대로 이야기다. 대신 그것이 사실이든 허구든 인과관계가 분명해야 하는데 이를 '내러티브'라 한다. 이에 비해 스토리텔링은 문자, 이미지, 영상, 음악 등을 활용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스토리텔링에서는 얼마나 그럴듯한 이야기냐 보다는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가가 관건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애초 우리나라 핸드전화 번호에는 011, 016, 019 하는 식으로 각 통신회사별로 부여된 식별번호가 있었다. 번호가 곧 브랜드이다 보니 특정 업체로의 쏠림현상이 나타났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2011년부터 '010번호 통합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던 SK텔레콤으로서는 뭔가 차별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딩딩디리딩'이라는 통화연결음. 소리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으니 이 또한 스토리텔링이다.
이처럼 전달되고 각인됨으로써 오래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 스토리텔링의 본질이다. 사람들은 때로 음식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기억하는 습관이 있다. 따라서 음식 또한 훌륭한 스토리텔링의 도구가 되고, 좋은 요리사는 유능한 스토리텔러가 될 수 있다.
부산 영도구 절영로 송도삼거리에서 시작되는 '흰여울마을'. 한국전쟁 중에 피란민들이 하나둘 모여 살면서 생긴 동네다 보니 좁을 골목을 두고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세월이 흘러 빈집이 하나둘 늘어나고 슬럼화가 진행되자 대책이 필요했다. 2011년 부산시는 전면 재개발 대신 마을 일부를 보존하기로 결정, 옛 정취를 살린 '문화마을'로 가꾸어 가는 중이다. 최근에는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변호인'의 촬영지로도 관심을 끌고 있다.
흰여울마을 초입에 1년 전 '달뜨네'라는 작은 식당이 생겼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고만고만한 수준의 식당인 달뜨네에는 흰여울마을과 너무 잘 어울리는, 그래서 흰여울마을을 찾으면 반드시 맛봐야 될 음식이 하나 있으니, 3500원짜리 시락국밥이다.
우선 달뜨네의 안주인인 박정원(55·사진) 대표의 시어머니인 양전복(87) 할머니는 북한 함경도 구룡리에서 어부의 딸로 태어났다. 음식 솜씨 좋기로 소문이 났고, 특히 갈치식혜는 일품이다. 박정원은 그런 시어머니의 손맛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함경도 출신 피란민의 솜씨가 대를 이어오니 흰여울마을의 역사와도 절묘하게 오버랩 된다.
거기다 이 값싼 시락국이 예사 물건이 아니다. 먼저 흰여울마을 앞바다에서 자생하는 곰피를 생수에 오래 불려 진액을 뽑아낸다. 미역의 일종인 곰피는 표면이 오돌오돌하고 약간 쌉싸름한 맛이 나 무침이나 쌈으로 더러 먹는다. 하지만 미역만큼 애용되는 식재료가 아니다 보니 보통 사람은 봐도 잘 모른다. 스킨다이빙이 취미인 남편 위승진(56) 씨는 이를 직접 채취해 볕 좋은 날 절영산책로에서 말린다.
이렇게 만든 곰피 진액에 멸치 대신 꼬치고기를 우려 낸 국물을 섞는다. 생김새는 멸치와 비슷하고 크기는 노가리만한 꼬치고기는 작은 멸치 따위를 먹이로 성장한다. 그래서 멸치를 잡기 위해 쳐 놓은 그물에 덩달아 걸린다. 이때 잡힌 꼬치고기는 쓸모 없고 거추장스럽다. 하지만 부지런한 어부들은 이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따로 챙겨 멸치처럼 한 번 쪄서 말린다. 이를 우려내면 멸치 못지 않게 감칠맛이 풍부하면서도 훨씬 개운하다.
한때 영도 앞바다는 남해안에서 소문난 멸치어장이었으니 곰피와 꼬치고기의 궁합 역시 지역성이 충분하다. 이렇게 만든 국물에 부부가 경남 고성군 약수암에서 직접 담아 3년 동안 숙성시킨 된장과 간장으로 간을 하고 우거지를 넉넉히 넣어 다시 한소끔 끓이니, 그 맛이 개운하기 그지없고, 오로지 달뜨네에서만 맛볼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다.
박정원의 시락국은 향토음식이라면 뭔가 거창하고 그럴듯한 스토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국물만큼이나 시원한 카운터펀치 한 방을 날린다. 맛을 찾아 국내외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녀의 시락국 만큼 지역성을 제대로 살린 음식은 흔치 않다. 요즘 사람들은 사진과 더불어 여행지에서 먹었던 그곳만의 특별한 음식으로 여행을 추억한다. 달뜨네의 시락국에는 흰여울이 일렁이는 영도의 바다가 오롯이 담겼고, 더불어 흰여울마을의 역사까지 녹아 있으니 흰여울마을을 기억하기에 이보다 좋을 수 없다. 그래서 박정원은 솜씨 좋은 요리사이기도 하거니와 꽤 훌륭한 스토리텔러 임에 분명하다.
박상현 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