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일시장·마트·에스프레소기계 수리공
- 일하며 '음료의 모든 것' 깨우쳐
- 소금·간장·청양고추까지 재료로 사용
- 늘 고정관념 도전하며 새로운 맛 탐색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독일 나치 정권의 선전장관을 지낸,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선전·선동가인 괴벨스가 남긴 말이다. 이 말을 '크레아 베버리지 아카데미' 김영하(34·사진) 원장에게 대입하면 이렇게 된다. "그에게 한 가지 식재료만 줘 보시라. 그러면 무엇이든지 음료로 만들어 준다".
김 원장으로부터 음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 '물고문'을 당할 각오를 단단히 하고, 화장실의 위치를 파악해 둬야 한다. 그리고 수첩과 필기구 혹은 녹음기가 필요하다. 입으로는 쉴 새 없이 음료에 대한 지식을 쏟아내면서도 1시간 만에 수십 가지의 음료를 만들어 낸다. 100㎏이 넘는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손놀림이 어찌나 빠르고 섬세한지,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 더 신통방통한 것은 그렇게 만들어진 음료가 하나 같이 맛있고 색과 장식까지 완벽하다는 점이다.
살면서 흔치 않은 경험이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위해서는 한 가지 고약한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 김영하는 항상 사람들에게 묻는다. "수프가 음식이라 생각하느냐 음료라 생각하느냐?".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문제라 다들 당황스러워한다. 이럴 땐 사전적 해석을 따르는 것이 제일이다. 국어사전에서 음료는 '사람이 마실 수 있는 액체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정의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술 커피 차 콜라 주스는 물론이거니와 수프 역시 음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흔히들 인간이 느끼는 '오미' 가운데 음료의 영역은 단맛 신맛 쓴맛으로 제한하고 짠맛과 매운맛은 음식의 영역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영하의 질문은 바로 이 지점을 노린 것이다. 그는 인간에게 습관적으로 배어있는 고정관념에 대해 늘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를 깨는 음료 개발에 몰두한다. 그 결과 소금과 간장, 심지어 청양고추까지 음료의 재료로 사용한다. 김영하는 "음료 역시 식재료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조리과학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집과 사무실에는 음료 및 식재료에 대한 수백 권의 책이 빼곡하다. 여러 개의 하드디스크에는 분량을 가늠키 어려울 정도로 방대한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어지간한 '음료 전문 아카이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김영하는 '레몬의 껍질에서는 향을, 과육에서는 구연산을 얻을 수 있다'는 원론적인 사실만으로 수백 가지 음료를 만들 수 있고, 얼음 하나로 몇 시간씩 강의가 가능하다. 이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미 박사급이고 실무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어지간한 프로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다.
이쯤 되니 궁금하다. 이 남자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김영하는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다. 몇 년 동안 낮에는 발굴 현장에서 땅을 팠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로 바텐더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인류가 인위적으로 만든 최초의 음식이 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술 공부를 시작했고, 2006년부터는 커피 공부를 시작해 바리스타가 되었다. 그리고는 음료라는 광범위한 세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음료에 가장 흔히 쓰이는 재료인 과일을 이해하기 위해 과일 시장에서 일을 했고, 세상 모든 음료를 취급하는 대형 마트에서도 근무를 했다. 또 기계를 알기 위해 에스프레소 머신 수리공으로 땀을 흘렸으며, 음료 관련 재료를 전문으로 수입·판매하는 유통회사에도 들어갔다. 덩치만큼이나 우직하게 오로지 한 길을 걸어온 셈이다.
포화상태라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커피전문점은 여전히 창업 희망 1순위 아이템이다. 이에 따라 커피 관련 자격증과 창업을 위한 교육기관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커피전문점의 매출 구조를 분석해 보면 커피보다 기타 음료와 디저트의 매출이 더 높게 나온다. 그럼에도 주야장천 커피만 붙잡고 있다. 음료에 대한 원론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영하는 이를 개선해 보자는 취지에서 2012년 부산 연제구 거제동에 '크레아 베버리지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그런데 아직은 그 진가를 알아봐 주는 이가 드물다. 홀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왔고, 부산이라는 지역적 한계 때문이다. 오히려 서울에서 더 많은 강의 요청을 받고 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음료 전반에 대해 궁금하거나 관련 업종의 창업을 준비 중이라면, 일단 김영하를 한번 만나볼 것을 권한다. 말 그대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박상현·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