梅 花
마음이 붉으면 매화도 붉고 마음이 희면 매화도 희다。
心造畵 畵造心。 직헌(直軒) 허달재 선생 화제(畵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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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화 마니아 김대현 씨가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에서 꽃망울을 터트리려는 매화를 바라보고 있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
매화에 '심하게' 꽂힌 사나이가 있다. 아니, 반쯤 미쳤다는 게 더 정확하다.
농협 부산본부의 김대현(50) 지역협력단장. 김 단장은 해마다 봄이 오는 길목에 서면 '탐매(探梅·매화를 찾아 가는 여행)'에 대한 욕심으로 몸살을 앓는다.
"매화 향기는 귀로 듣습니다." 고상한 존재의 향기는 후각뿐만 아니라 귀도 동원해야 알 수 있다는 의미다.
귀로 향기를 듣기 위해 김 단장은 봄이면 전남 구례로, 순천으로 달려간다. 1박2일, 2박3일도 문제가 아니다. 매화의 고상한 기품을 담으려 1000만 원 가까운 큰돈을 들여 카메라 장비도 선뜻 구입했다.
김 단장이 매화에 미치기 시작한 것은 5년 전이다. 취미로 사진을 찍다가 빗방울을 살짝 머금은 매화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매화나무가 있다는 양산 통도사로 곧장 차를 몰았다. 그는 그 때까지만 해도 매화 향기를 맡아본 적도, 매화가 활짝 핀 토종 매화나무를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통도사 홍매를 처음 만나던 날, 김 단장은 매화의 고풍스러운 멋에 빠져버렸다. 절집 처마에 살짝 걸린 듯, 아직은 이른 봄바람에 어깨를 움츠린 듯, 가늘게 흔들리는 매화나무에 반했다.
통도사 뜰을 오가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셔터를 눌러댔다. 그날 이후 매화는 김 단장의 삶에 깊이 들어왔다. 통도사 홍매는 봄을 알리는 이정표가 되었다.
문제는 향기. 김 단장은 통도사에서 매화향을 느낄 수 없었다. 어떤 이는 매화가지를 끌어당겨 코앞에 대기도 했다. 매화가지 아래서 눈을 지긋이 감고 향기를 음미하기도 했다.
"그날 제 마음이 정갈하지 못해서인지 매화 향기를 맡을 수 없었어요."
열병 앓듯 약 한 달을 기다렸다가 처음으로 1박2일 탐매여행을 떠났다. 전남 구례의 화엄사로 흑매를 만나러 갔다. 그날은 새벽에 가랑비가 내렸다. 아침에 비가 그쳤다. 빗방울이 화엄사 매화 끝에 송이송이 매달렸다. 약한 봄햇살이 화엄사 뜰에 닿았다.
"아치고절이라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아담한 풍치와 높은 절개.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은하고, 쉽게 다가옴을 허락하지 않을 듯하나 결코 깐깐하지 않은,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있었지요."
그러나 화엄사에서도 매화향은 '들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순천 선암사로 달려갔다. 마음은 초조했다. 매화향이 더 궁금했다. 선암사 무우전 돌담길에서 들어선 김 단장은 매화향기를 난생처음 맡았다. 태어나 처음 맡은 향기에 "'그윽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고 평했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도 잊고, 돌담길을 한나절 내내 왔다갔다 했다. 짧은 골목길에서 다만 서성거렸다. "아주 약하고, 묽게 피워올린 향" 같은 매화향기는 공장에서 찍어낸 향수처럼 코끝을 무례하게 불쑥 파고들지 않았다. 주위에서 바람결에 스치듯 은은하게 맴돌 뿐이었다.
그는 봄마다 매화향을 찾아 통도사-화엄사-선암사를 순례한다. 올해는 거기다 전남 장성 백양사에 있는 천연기념물 486호 '고불매'도 순례지에 추가할 예정이다.
김 단장은 "탐매 여행이 몇 년 전부터 관심을 끌고 있다"면서 "사람이 북적거리는 매실농원에서 봄을 맞는 것도 좋다. 그러나 고즈넉한 사찰이나 꼬장꼬장한 선비가 살던 집의 담장에서 매서운 겨울바람을 이겨내고 핀 수백 년 된 고매를 찾아가는 것도 꽤 운치있는 여행"이라고 소개했다.
◇ 김대현 단장 추천 매화 좋은 곳
야윈 듯하면서 기괴하게 뒤틀린 모양. 그 가지에 점점이 매달린 단아한 꽃. 평정을 유지한 마음이라야 맡을 수 있는 향기. 매화 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고전 속의 매화
퇴계 이황 선생에게 매화는 특별했다. 유명한 일화 한 토막. 퇴계 선생은 세상과 이별하던 날 아침, "저 매화 화분에 물을 주어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또 병이 위중해 옷을 입은 채 설사를 하고는 "매형(梅兄)에게 불결하니, 마음이 절로 미안하다"며 곁에 있던 매화 화분을 옮기라고 했단다.
중국 남송대의 문인 범성대는 '매보'에서 "매화는 천하에 으뜸가는 꽃으로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 어진 사람, 불초한 사람을 불문하고 모두가 좋아하는 꽃"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매화나무는 줄기가 옆으로 뻗고, 구불구불하게 뒤틀리고, 성글고 야위며, 기괴할수록 운치와 품격이 더해진다고 덧붙였다.
알려진 대로 매화는 난초 국화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 가운데 하나이며,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추운 겨울의 세 벗 '세한삼우' 중의 하나로 꼽힌다.
■통도사 자장매·산청 남명매
양산 통도사에는 해마다 봄이면 탐매객들을 유혹하는 홍매(紅梅) 3그루가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 오른쪽 종무소로 가기 전 극락보전 뒤에 수령이 150년 넘는 홍매 두 그루가 나란히 있다. 한 그루는 꽃잎이 겹으로 된 짙은 홍매이고, 다른 한 그루는 꽃잎이 5장이며 백매(白梅)에 가까운 연분홍 빛을 띤 홍매다. 영특하게도 선 자리에 따라 피는 시기와 빛깔이 조금 다르다.
이 홍매 두 그루가 있는 곳에서 가까운 영각 앞에는 일명 자장매(慈臧梅)로 알려진, 수령이 350년은 족히 넘은 것으로 알려진 홍매가 있다. 꽃잎은 5장이고, 고운 분홍색깔을 머금는다. 어떤 이들은 자장매를 우리나라 홍매의 표준이라고 칭찬한다.
통도사의 홍매 3그루는 매화가 피기 시작할 때부터 만개할 때까지 탐매객들과 사진애호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통도사 매화는 날씨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3월초에 만개한다.
김해시 구산동에 위치한 김해건설공고 교정에도 매화길을 따라 수령이 100년 가까이 되는 제법 오래되고, 기이하게 뒤틀린 매화나무가 많다. 특히 용이 꿈틀거리며 기는 듯한 모양의 일명 '와룡매'가 유명하다. 3월 중순쯤에는 매화축제도 열린다. 작년에는 3월 하순에 만개했다.
지리산 기슭,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는 조선 중기 성리학자 남명 조식이 후학을 가르치던 산천재가 있다. 이곳에는 '산청 3매' 중의 하나로, 남명 선생이 심었다는 '남명매(南冥梅)'가 있다. 하얀 빛깔의 백매다. 조식 선생은 정원의 매화를 보며 "매화가 피어나니 맑은 기운이 생긴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남명매는 450년 정도의 수령으로, 조식 선생의 강직한 기품을 닮은 '명품 매화'로 알려져 있다. 특히 지리산 자락의 청정한 곳이어서인지 매화 향기가 유달리 짙다는 평가를 받는다. 남명매는 보통 3월 하순, 순천 선암사나 구례 화엄사 매화보다 일찍 핀다. 작년에는 4월 5일께 만개했다.
산청에서는 이밖에 500년 역사를 지닌 양반마을, 단성면 남사리 예담촌에서도 선비의 기품을 담은 '분양매' 등 유서 깊은 매화를 만날 수 있다.
■화엄사 흑매·선암사 백매
전남 구례 화엄사에는 각황전과 원통전 사이에 흑매(黑梅)로 불리는 화엄매가 있다. 수령은 350년 이상으로 추정되며, 보랏빛이 감돌아 검붉은 빛을 띤다. 수형(나무 모양)도 멋스럽거니와 다른 매화들과 비교하면 꽃잎은 작지만 색깔은 가장 곱고 강렬하다고 알려졌다.
화엄사 흑매가 한창 필 때쯤이면 전국에서 모여든 탐매객과 사진애호가들의 발길이 북적인다. 절집과 기막히게 어울린 흑매는 어디에서 찍어도 한 폭의 그림이 된다.
화엄사의 부속 암자인 길상암 아래 비탈에는 수령 450년 정도로 추정되는 백매가 있다. 천년기념물 485호. 이 매화나무는 짐승이 매실을 먹고 뱉은 씨가 저절로 발아해 성장한 것으로, 야매(野梅)로 불린다. 이름에 걸맞게 수형은 거친 듯 하면서도 강인한 힘이 느껴진다.
화엄사 흑매는 보통 3월말에서 4월초 만개한다. 작년에는 4월13일께 만개했다.
전남 순천 선암사는 토종매화 나무가 가장 많은 절이다. 조선말의 천재 화가 장승업의 생애를 그린 영화 '취화선'(2002년 개봉)의 무대가 됐던 곳으로, 무우전 돌담을 따라 500년 이상된 토종매화나무 70여 그루가 늘어서 있다.
그 중에서도 원통전 앞의 수령 620년이 넘었다고 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백매를 일컬어 '선암매(仙巖梅)라고 한다. 천년기념물 488호.
대웅전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서 있는 홍매와 첨성각 앞에 있는 백매의 수령도 400백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들은 수형이 고풍스럽고 아름답다. 수백년 세월을 버티며 살아낸 매화나무가 피워올린 향기는 사찰을 가득 채운다. 선암사 매화가 핀 무우전 돌담길을 왔다갔다 하면 분명 매화향기에 취할 수밖에 없다.
이밖에 전남 담양의 서원인 죽림재에 있는 110년 수령의 홍매, '죽림매'가 있고 명옥헌 원림에 있는 100년 된 '명옥헌매'도 탐매객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곳이다.
정확한 만개 시기는 사찰의 종무소(통도사 055-382-7182, 화엄사 061-783-7600, 선암사 061-754-5247, 백양사 061-392-7502)에 개화 상태를 알아보는 게 좋다. 사진 전문사이트(출사코리아 http://chulsa.kr/)의 출사지정보를 통해 확인해 보는 것도 확실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