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국강병에서 네트워크의 시대로'.

2001년 9월 1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이른바 '9·11 테러'는 21세기의 새 패러다임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전쟁이란 국가 간 영토를 둘러싼 다툼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이제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9·11은 보여줬다. 알 카에다란 하나의 테러집단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것이다.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우선 영토란 무의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거대한 영토와 막강한 군사력도 테러에 속수무책이었다. 반면 네트워크의 가공할 위력을 확인했다. 영토도 국가도 없는 테러집단이 그물망 같은 국제적인 조직을 갖춤으로써 엄청난 힘을 발휘한 것이다. 여기에다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한 이른바 사이버 네트워크의 막강한 파워도 볼 수 있었다.

21세기의 화두는 단연 '네트워크'임을 알게 한다. 영토와 안보가 중시되던 시대가 '하드파워의 시대'였다면, 네트워크가 중시되는 지금은 '소프트파워의 시대'라 할 수 있다. 하드파워는 국가와 영토를 기반으로 부국강병을 최대의 목표로 하지만, 소프트파워는 경제와 문화 등을 매개로 지식국가의 구축을 목표로 한다.

이미 세계는 네트워크 시대에 접어들었다. 9·11을 통해 네트워크의 위력을 실감했지만, 경제 문화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우리는 초국가 네트워크를 수없이 경험해 왔다.

우선 글로벌 기업(다국적기업)들을 보자. 세계경제무대에는 6만여 개의 글로벌 기업들이 있고, 70만 개의 협업기업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이 중 200대 글로벌 기업이 세계 경제활동의 25%를 차지한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기업들이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 당연히 그 기업의 국적은 무의미하다. 초국가적인 형태의 네트워크가 이들 기업의 파워를 지탱하고 있는 셈이다.

비정부기구라고 하는 사회단체들 역시 세계정치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들 단체도 초국가적 네트워크가 힘의 원천이다.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비정부기구가 2000년대 초반 1만3000여 개에 달한다는 보고서도 나와 있다. 이런 기구들은 최근 급격히 늘고 있다. 점차 영향력이 커질 것임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이런 네트워크가 큰 힘을 발휘하게 된 저변에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이 자리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사이버 네트워크의 힘은 21세기를 지탱하는 큰 축이다. 전 세계의 인터넷 사용자 수가 지난해 말 11억 명, 2010년에는 18억 명에 이를 것이란 전망이 나와 있다. 전세계인구(65억 명)의 20% 정도가 인터넷을 활용하고 있으며, 앞으로 그 비율이 더욱 늘어날 것임을 보여준다. 물론 초국가적인 네트워크가 중요하다고 해서 영토나 안보를 매개로 한 부국강병론을 폐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소프트파워를 중시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경제가 언어이고 문화가 하나의 상품인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부산대 이철호(국제정치) 교수는 "21세기의 화두는 단연 네트워크"라면서 "중앙집권적인 사고가 아니라 네트워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과 국가가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