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푸틴의 요리사’로 불렸던 예브게니 프리고진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 수장의 갑작스러운 비행기 추락사 소식에 음모론이 확산하고 있다. 프리고진이 두 달 전 일으킨 무장반란 때문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응징 당한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는 가운데 그의 죽음이 위장된 것이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까지 떠돈다.

러시아 재난 당국은 24일(현지 시간)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던 브라에르 레가시 제트기가 트베리 지역의 쿠젠키노 주변에 추락했다”며 “초기 조사 결과 승무원 3명을 포함해 탑승한 10명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텔레그램을 통해 밝혔다. 당국은 탑승자 명단에는 지난 6월 말 무장반란을 시도했던 바그너그룹의 수장 프리고진도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사고를 당한 제트기는 프리고진의 전용기였다.

프리고진은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 그룹 수장으로 우크라이나 전장을 지휘하다가 지난 6월 돌연 러시아 군 수뇌부 처벌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바그너 그룹 소속 용병들이 모스크바를 향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프리고진은 푸틴 대통령의 등에 칼을 꽂은 ‘반역자’가 됐다. 해외 정상들의 중재가 계속됐고, 프리고진은 처벌을 받지 않고 벨라루스로 망명하는 조건으로 반란을 중단했다. 이후 그는 벨라루스와 러시아를 오가는 모습이 수 차례 확인됐다.

프리고진은 지난 21일 텔레그램 동영상을 통해 바그너 그룹의 본거지가 있는 아프리카 사막에서 위장복을 입고 소총을 든 모습을 공개했다. 그는 “바그너 민간용병기업은 모든 대륙에서 러시아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고 아프리카를 더 자유롭게 만든다”고 말했다..

예브게니 프리고진(위)이 2011년 11월 11일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의 프리고진 레스토랑에서 당시 러시아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음식을 서빙하고 있다. 연합뉴스

23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인근 트베리 지역의 쿠젠키노 마을 근처에서 전용기 잔해가 추락하는 모습. 이날 러시아 당국은 용병 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이 전용기에 탑승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번 사고로 탑승자 10명이 전원 사망했다. 연합뉴스

●푸틴 배후설…“배신에 따른 후과”

해외 매체들은 프리고진의 죽음이 ‘예고된 사고’라고 잇따라 보도한다. 프리고진의 죽음에 대해 영국 매체는 정보 당국자의 말을 인용해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의 소행인 것으로 본다고 보도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보도에서 소식통은 “당연하게 푸틴이다. 우두머리로서 푸틴은 그가 당했던 굴욕을 용납할 수 없다”면서 “푸틴은 두 가지로 움직인다. 재능에 따른 충성심, 그리고 배신에 따른 후과”라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모든 배경, 모든 습성, 모든 과거가 FSB를 지목한다”면서 “FSB는 푸틴에게 여전히 충성한다”고 덧붙였다.

해외정보국(MI6) 전 국장인 리처드 디어러브도 프리고진이 탄 전용기 추락이 단순 사고가 아니라고 봤다. 디어러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이 사고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를 것”이라며 “사고처럼 보이겠지만 의심스러운 요인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서방 모든 이들이 동일한 결론에 이를 것”이라며 “푸틴이 자신의 권력 기반에 도전한 상대에게 보복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4년간 모스크바에서 활동했던 영국 정보국 요원 존 포맨도 사고 시점에 주목하며 “프리고진의 사망은 일종의 러시아 오페라”라면서 “시점이 우연이 아니다. 프리고진이 모스크바로 돌진한 지 두 달 며칠 만에 죽음을 맞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사전 준비를 해왔다는 점에서 러시아 시스템의 속도가 나를 놀라게 했다”면서 “푸틴은 자신을 위협한 이들에게 복수를 할 것이며, 자신에게 맞서려는 누구에게라도 으스스한 효과를 남겼다”고 덧붙였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푸틴이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러시아 엘리트에게 경고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은 X(옛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무장 반란 두달 만에 프리고진을 공개적으로 제거한 것은 2024년 대선을 앞두고 푸틴이 러시아 엘리트층에게 보내는 신호”라면서 “‘조심해. 배신하면 죽음이야’라는 것”이라고 썼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이번 사고 보고를 받고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난 놀랍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난 답을 알 만큼 충분히 알지 못한다”면서도 “러시아에서 푸틴이 배후에 있지 않은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프리고진이 무장반란을 시도한 직후 그의 신변을 우려하는 관측은 계속 나왔다. 그가 반란을 포기한 뒤 기거한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의 호텔 객실에는 창문이 전혀 없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당시 마크 워너 미국 상원 정보위원장은 “정말 창문 없는 호텔에 묵고 있다면 프리고진이 푸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푸틴과 충돌한 많은 러시아인들이 건물에서 불가사의하게 떨어져 숨졌다”고 언급했다.

러시아에서 무장반란을 시도했던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23일(현지시간) 모스크바 인근 트베리 지역에서 전용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수사관들이 사고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6월 4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기념품 가게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민간 군사기업 바그너 그룹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소유주를 묘사한 마스크가 판매용으로 전시되어 있다. 연합뉴스

●정적 잇단 의문사…“찍히면 다 죽는다”

실제 푸틴 정권에 반기를 든 인사들이 의문사 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2006년 6월 발생한 ‘홍차 독살 사건’이 푸틴 대통령이 배후로 지목되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 사건은 영국으로 망명한 전직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가 한 호텔에서 전 동료가 전해준 홍차를 마시고 숨진 사건이다. 사건 직후 찻잔에서는 자연 상태에서 존재하기 어려운 방사성물질인 폴로늄이 발견됐다. 같은 해 10월 7일에는 야권 지도자였던 안나 폴릿콥스카야가 자택으로 가는 아파트 계단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사건이 발생한 날은 푸틴 대통령의 생일이었는데, 안나 폴릿콥스카야는 러시아군의 체첸 주민 학살을 고발했던 언론인 출신이다. 2013년 러시아 올리가르히(신흥재벌)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의 사망도 의문사로 남았다. 영국으로 망명한 베레조프스키는 런던 부촌의 자택 욕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자신의 자동차에 설치된 폭탄이 폭발해 운전사가 숨지는 등 여러 차례 암살 위기를 넘겼다. 2015년에는 보리스 넴초프 전 총리가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괴한들의 총에 맞아 숨졌고, 지난해 9월에는 러시아 최대 민영 석유업체인 ‘루크오일’의 라빌 마가노프 회장이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추락사했다. 마가노프 회장은 작년 2월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프리고진의 사망 사고 당시 푸틴 대통령은 쿠르스크 지역에서 ‘쿠르스크 전투’ 승전 80주년 기념식을 주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쿠르스크 전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사상 최대 규모의 기갑전으로 꼽힌다. 전투 결과 소련군은 현 우크라이나 동부 도시인 하르키우를 탈환했다. 이날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오늘날 싸움의 모든 짐이 우리 군인들과, 최전선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있다”고 격려했다. 이날 행사에서 푸틴 대통령의 모습은 ‘쾌활한’ 분위기였다고 미국 매체인 폴리티코는 전했다.

러시아 트베리 지역 쿠젠키노 마을 인근에서 발생한 전용기 추락 사고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가운데 24일(현지시간) 사법 당국 직원이 사고 현장을 경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위장 죽음설도…“크렘린 속인 자작극”

이런 가운데 온라인에서는 프리고진이 죽은 것처럼 위장했을 뿐 실제로는 살아있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모스크바에서 두 대의 비행기가 짧은 시차를 두고 이륙했으며 프리고진은 추락하지 않은 두 번째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뉴스위크도 프리고진의 죽음에 대한 갖가지 추론과 추정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확인된 사실이 프리고진이 추락한 비행기 탑승자 명단에 있다는 것뿐이어서 실제 탑승 여부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군사 블로거인 이고리 수슈코는 X에 프리고진의 죽음을 확인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서 반란의 또 다른 주역인 우트킨이 프리고진과 함께 같은 비행기에 탔다는 것도 상상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고가 프리고진이 크렘린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꾸민 자작극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매디슨 위스콘신대학의 미하일 트로이츠키 교수는 이번 비행기 추락 사고가 의도적인 파괴행위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트로이츠키 교수는 이번 사고가 프리고진의 자작극일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면서 러시아 내 권력투쟁이 격화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친(親)바그너그룹 텔레그램 채널 그레이존은 “사고 시점에 바그너그룹 전용기 2대가 동시에 비행 중이었고, 1대가 추락한 뒤 나머지 1대는 모스크바 남부의 오스타피예포 공항으로 회항했다”며 프리고진의 생존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이후 입장을 바꿨다.

러시아에서 무장 반란을 시도한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사태 후 2개월 만인 24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약 300㎞ 떨어진 트베리 지역 쿠젠키노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사진은 이날 추락 지점 인근을 봉쇄한 경찰의 모습.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