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쟁 후에 신군부 집권했지만
- 6월항쟁 등 창조적 전진 이뤄”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는 부산 중부교회 등 당대 기독교 세력의 사회운동이 시민 의식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봤다. 유신 철폐를 향한 시민의 열망은 항쟁을 직접 목도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결행’으로 이어졌으며, 그의 행동을 ‘내란목적살인죄’로 규정한 사법적 판단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아래는 일문일답.
-왜 ‘부마민주항쟁’ 대신 ‘부마 시민혁명’인가.
▶부산대에서 용감하게 일어난 선각자적인 학생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받아주고 그들과 함께 불을 지핀 사람은 여기 사는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시민이 ‘그대들이 하는 행위는 바로 우리가 해야 할 행위다’는 자각을 했고, 그런 자각이 밑에서부터 일어났다는 의미에서 혁명이라고 봐야 한다.
-중부교회와 부산양서협동조합 같은 종교·문화적 기반을 시민 혁명의 배경으로 본 이유는.
▶학생의 불씨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거대한 층은 시민이다. 그냥 시민이 아니라 1979년 당시 의식화된 시민이다. 이들의 의식화에는 당시 기독교 관계 세력의 역할이 컸다. YMCA 등을 통해 사회운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고 국제조직이 있어 정부에 압력을 넣을 수도 있었다. 그 중심에 기독교장로회가 있었다. 부산 중부교회가 그렇다. 그 중심 인물이 최성묵 목사다. 의식 있는 학생들이 최 목사에게 모여들어 양서협동조합이라는 운동을 하게 된다. 서적으로 조직운동을 한다는 발상이 당시로서는 기발했다. 그 호응이 커서 부산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니 부마 시민항쟁은 굉장히 지적인 운동이기도 하다.
-김재규의 행동을 ‘결행’으로 보는 까닭은.
▶부마 시민혁명은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을 쏨으로써 완전히 종식시킨 사건이다. 결행에 도달하는 동안 김재규가 겪어야 했던 고뇌는 우리나라 모든 사람의 고뇌였다. 김재규는 5·16 전부터 박정희를 존경했고 우정을 간직하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중앙정보부장이 돼 부마 현장에 와서 서너 시간을 살펴봤고, 항쟁이 전 국민의 소요로 금방 번져갈 수 있는 시민의 혁명이라고 했다. 이 상황에서 가장 ‘간단하고 정확한 해결 방법’을 내 손에 쥐고 있으니까, 결행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고민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사일 밤에도 호텔 복도에서 밤새 고민하면서 서성거리던 모습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그를 내란목적살인죄로 처벌한 것은 잘못됐다. 거사가 아니었으면 우리 역사는 20년 이상 느려질 수 있었다.
-부마항쟁 두 달 만에 신군부가 집권했다. 그렇다면 혁명이 결국 좌절된 것 아닌가.
▶박정희를 둘러싼 이들의 멘탈리티가 반민주적이고 폭력적이었음을 반증하는 사건들일 뿐이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실제적인 역사의 주체가 아니다. (12·12 등은) 김재규가 쏜 총알이 유신의 심장을 꿰었고, 그 심장이 완전히 멈추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 결행 뒤에도 신군부가 집권해 서울의 봄, 6월 항쟁 등 어마어마한 사건들이 이어지지만 그것은 우리 역사의 창조적인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지 절대 후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