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생 때부터 가장 … 진학 포기
- 알바해도 생활·치료비로 빚더미
- 돌봄 부담 사회가 함께 나눠야
스무 살 청년은 자동차 문을 여는 방법을 몰랐다. 평생 가족 간병에 갇혀 차를 탈 기회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여행은커녕 학원조차 다니지 못했다. 일본 취업 기회가 찾아왔으나 어머니는 “네가 가버리면 남은 가족은 어떡하느냐”며 만류했다. 생활비와 학자금 대출 명목으로 어머니에게 건넨 900만 원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매일 반복하는 간병 노동은 분노와 연민을 동시에 부른다. 아버지가 과거 아팠을 때 그냥 죽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행복한 상황이 오면 도리어 깨질까 봐 불안감이 엄습한다. 회사 동료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지만 ‘민폐’가 될까 봐 입을 닫는다.
■독박 간병에 학업·취업 포기
9일 부산연구원이 발표한 부산시 가족돌봄 청소년 및 청년 실태와 지원방안 보고서에 나온 20대 중반 이진우(가명) 씨 이야기다. 이 씨는 대학 졸업 후 경제적 압박으로 빨리 취업할 수 있는 호텔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이 씨는 “가족 간병이 청년 자립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며 “인간관계를 피하는 성향으로 변했다. 가끔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지만 생사만 확인하는 수준”이라고 털어놨다.
또 다른 청년 박민수(가명) 씨 상황도 비슷하다. 박 씨는 조현병 어머니를 홀로 돌보느라 대학을 포기했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친척으로부터 가장 역할을 강요받은 이후 꿈은 멈췄다. 박 씨는 “수학자가 꿈이었다. 여유로운 가정에서 태어났다면”이라며 아쉬워했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며 기숙사가 있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으나 가족과 연을 끊을 정도로 모질지 못했다.
희귀 난치병 부모를 둔 또 다른 청년은 국가 암 지원을 받아도 비급여 치료비 감당이 어려워 고교 졸업 후 곧바로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었다. 주 7일 쉬지 않고 일하며 무기력하고 우울한 감정을 강제로 둔화시킨다. 수도권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으나 평생 부산에 산 할머니를 홀로 둘 수 없어 진학을 포기한 청년도 있다. 그는 대학 생활 내내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학교와 병원만 왕복했다. 결국 생명공학 연구원 꿈을 접고 안정적인 생계유지가 가능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우연에 기대는 발굴
현장에서 만난 사회복지사들은 가족돌봄 청소년·청년을 찾아낼 공식 발굴 체계가 없다고 지적한다. 대부분 학교 교사나 복지기관 실무자가 우연히 발견하는 방식에 의존한다. 학교 담임교사나 상담 제도는 진로 설계 과정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심층면접에 참여한 상당수 청년은 “학교 담임 선생님과 상담한 적이 별로 없고 도움이 된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거나 “진로 설계 상담은 진짜 도움 안 됐다”고 떠올렸다.
부산연구원은 학교와 부산시, 교육청 협력체계 구축을 제안했다. 신학기 기초조사서에 돌봄 관련 문항을 반영해 조기 발굴 체계를 만드는 구상이다. 광역과 구·군에 전담 거점을 이원화해 설치하자는 제안도 담았다. 소득 재산 연령 기준을 유연하게 적용할 심의위원회 설치 방안도 함께 내놨다. 일정 기간 이상 돌봄을 수행한 청소년과 청년에게 경력 인증서를 발급하는 ‘돌봄경력인정제’ 도입도 제시했다. 부산시 산하기관과 공공기관 채용이나 인턴십 선발 때 우대 혜택을 적용하는 방안이다.
부산연구원 연구진은 “가족돌봄 청소년과 청년이 겪는 어려움은 개인이나 가족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나눠야 할 구조적 문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