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 3명 뿐…부산서 4년째 활동
- ‘영화숙·재생원’ 피해자지원단 간사
- 발달장애인 투표편의 소송도 진행
부산에서 사회적 소수자가 법률 조력이 필요한 상황에 빠지면 십중팔구 이주언(43·사법연수원 41기) 변호사를 만나게 된다. 장애인 단체 등이 약자의 송사를 도울 때 가장 먼저 전화를 거는 변호사란 의미다. 그가 부산 유일의 ‘공익전업변호사’이기 때문이다.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을 통틀어 이 변호사처럼 공익사건만 다루는 변호사는 세 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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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언 공익전업변호사. 공익법단체 두루 제공 |
올해로 4년째 부산을 무대로 활약 중인 그는 지역의 굵직한 인권 사안마다 힘을 보탰다. 그는 부산의 부랑인 수용소 ‘영화숙·재생원’ 피해자 지원단 간사다. 이들이 국가로부터 당한 아픔을 회복하도록 소송을 지원하고,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뜻을 사회에 제대로 남길 수 있도록 유언장 작성을 돕는다. 지난해엔 UN 고문방지위원회가 한국의 집단수용시설 참상이 세계에 증언되도록 피해자 대표를 스위스 제네바까지 직접 수행했다.
지난 1월엔 발달장애인의 투표 편의를 위한 소송에서 승소를 거뒀다. 그가 직접 소송에 나설 원고를 모집해 시작한 소송이었다. 선거 규정상 발달장애인은 신체적 어려움이 큰 경우가 아니고선 가족 등 자신이 지명한 보조원과 함께 기표소에 들어갈 수 없다. 동행인이 특정 후보를 뽑도록 유도해 ‘1인 2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이유다. 그런데 발달장애인은 평소 유대가 없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불안을 느껴 판단·결정에 지장을 겪을 수 있다.
이 변호사는 “현장마다 중구난방이었다. 어떤 곳은 발달장애인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동행인을 들여보내는데, 다른 곳은 면접 보듯 묻는 식이니 실랑이가 벌어졌다”며 “그냥 거소투표를 신청해 실랑이를 벌이지 말자는 분도 계셨다. 이러면 선관위가 감독할 여지가 없어지니, 우려하는 일이 오히려 부추겨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2009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순간부터 공익 활동을 희망한 그는 2012년 사법연수원을 마친 뒤 첫 직장으로 일반 로펌을 택했다. 정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변호사로 거듭나려면 먼저 사회를 경험하고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이 변호사는 착하고 친절한데 소송은 결과가 안 좋아’ 같은 이야기를 들을까 봐 겁이 났다. 먼저 다양한 세상을 경험해보자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2022년 고향 부산으로 온 그에게는 사무실이 따로 없다. 공익 활동에 집중하려면 사무실 운영 부담을 덜어야 해서다. 사무실을 마련하고 직원을 뽑으면 비용이 발생한다. 운영비를 구하려면 국선 사건 등 어느 정도 벌이가 되는 일을 여러 건 맡아야 한다. 달리 말하면 공익 활동에 전념하고자 ‘벌이가 되는 사건’을 마다하는 셈이다. 그가 소속된 공익법단체 ‘두루’가 지원하는 인건·활동비가 벌이의 대부분이다.
그는 “공익변호사를 찾는 분은 생계가 어려우니 수임료 받을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며 “혼자 모든 사건을 맡을 수 없으니 공익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변호사를 모집해 팀을 꾸리곤 소송구조 제도나 부산변호사회 인권위원회 구조 사업으로 받은 활동비를 조금씩 나눈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받은 활동비 또한 두루에 기부한다. 그는 “생계는 신랑과 맞벌이를 하면서 해결이 돼 괜찮다”고 했다.
다대포를 바라보며 성장한 이 변호사는 ‘김보은 양 사건’ 소송대리인 배금자 변호사의 저서 ‘이의 있습니다’를 읽고 법조인의 꿈을 키웠다. 다대고 졸업 뒤 성균관대 법학과에 들어가선 뇌병변 장애인을 위한 야학 교사로 일하며 법조계와 잠시 거리를 뒀으나, 이내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을 접하며 다시금 법조인을 지망하게 됐다. 약자에게 헌신하고 사회의 공익을 추구하는 이들을 뒤따르고 싶었다.
그는 “공부하던 책상에 조영래 변호사의 얼굴을 연필로 그렸다. 매일 그 얼굴을 보고 공부했다. 그의 발끝만치라도 따라가고 싶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