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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하루 전 전사한 오빠…유품엔 동생들 선물 가득

UN공원에 잠든 용사들…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2 <9> 네덜란드군 故 마리우스 햄펠

  • 김진룡 기자 jryongk@kookje.co.kr
  •  |   입력 : 2023-08-27 18:58:35
  •  |   본지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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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남매 든든한 맏이 마리우스
- 가족들 전쟁터 참전 반대에도
- “한국, 도움 필요하다”며 설득
- 마지막 정찰 적군 총알에 영면
- 막내 동생은 6·25 발발일 출생

- 여동생 티니 씨 “오빠 희생으로
- 韓 평화 되찾게 돼 자랑스러워”

“한국전쟁에 참전한 큰오빠는 정전협정일을 하루 앞둔 1953년 7월 26일 전사했습니다. 동료와 마지막 정찰을 떠났다가 적의 매복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 아직도 ‘한국’이란 단어는 저의 머릿속에 아주 뚜렷하게 각인돼 있습니다.”

네덜란드 동부 헬데를란트의 셰르펜젤에서 만난 티니 반 데 켐프 햄펠(여·80)은 한국전쟁과 얽힌 가족사를 전했다. 여덟 남매 중 맏이였던 그의 큰오빠는 네덜란드 반 호이츠 부대 소속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마리우스 햄펠이다.

“큰오빠는 전쟁 마지막 날 전사했는데, 막내 여동생은 전쟁이 시작한 1950년 6월 25일 태어났어요. 우리 여덟 남매의 삶과 죽음이 한국전쟁과 깊이 연관돼 있어 한국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한국이란 말만 들어도 벌떡 일어설 정도예요.”
정전협정 하루 전 전사한 마리우스 햄펠(오른쪽)이 한국전쟁 중 일본 도쿄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가족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마리우스다. 티니 반 데 켐프 햄펠 제공
■ 1년 동안 염원한 한국행

마리우스는 1933년 1월 20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성장한 그는 18세에 공군 파일럿이 되고 싶었다. 파일럿의 꿈은 쉽지 않았다. 입대 과정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왼쪽 눈의 시력이 좋지 않았다.

마리우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파일럿이 안 되면 전쟁터라도 나가고 싶었다. 당시 헤이그 골목 곳곳에서는 한국전쟁 참전을 독려하는 전단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네덜란드에서는 21세를 넘겨야 성인으로 인정받아 자원할 수 있었다. 마리우스가 입대해 한국으로 가려면 부모의 동의서가 필요했다.

“부모님은 당연히 오빠가 전쟁터에 가는 걸 반대했어요. 오빠는 1년이란 시간 동안 꾸준히 부모님을 설득했죠. 당시 개신교를 믿었던 오빠는 공산주의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또 한국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어요. 결국 부모님의 허락을 받은 오빠는 1952년 8월 3일 집을 떠나 한국으로 향했어요.”

티니는 마리우스가 기초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네덜란드 루젠달로 떠나는 기차를 탈 때를 아직도 잊지 못했다. 티니는 당시 9세였다. “어머니는 기차를 탄 오빠를 배웅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마리우스를 보지 못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1년의 기다림 끝에 1952년 8월 21일 한국에 도착한 마리우스는 반 호이츠 부대에서 일반 보병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였지만, 고국의 동생들을 향한 그의 마음은 부모와 다르지 않았다. “한국에서 집으로 배달된 오빠의 편지엔 일상적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일본 도쿄로 휴가를 다녀온 오빠의 이야기도 있었죠.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산 선물도 있었습니다.”

■ 마지막 정찰

마리우스가 가지고 다니던 성경책.
1953년 6월이 되자 한국전쟁의 휴전회담이 급물살을 탔다. 그해 7월 27일 오전 10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의 정전협정 체결이 예정돼 있었다. 마리우스의 귀국도 멀지 않았다. 모든 가족이 그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정전협정 당일 가족은 믿을 수 없는 라디오 뉴스를 접했다.

“오빠가 전쟁터로 간 뒤 아버지는 매일 오전 7시 라디오로 한국 소식을 들었어요. 마침내 정전협정 날이 다가왔죠. 그런데 그날 이상하게 라디오 뉴스에 네덜란드 병사 5명의 사망 소식이 흘러나왔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빠가 포함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어요. 부대가 전선에서 철수했겠다고 생각했죠.”

일주일 뒤 마리우스가 전사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티니의 집으로 전달됐다. “개신교 목사가 우리 집에 방문해 오빠의 전사 소식을 전해줬습니다. 당시에는 누군가가 죽으면 개신교 사제가 이런 소식을 전했어요.”

마리우스는 정전협정을 이틀 앞둔 25일 밤 10시 강원도 철원 38선 인근의 전방에 머물고 있었다. 현재는 비무장지대가 된 곳이다. 당시 네덜란드군 소속의 헨드릭 도나 중위는 마지막 정찰을 위한 병사를 모았다. 14명의 병사가 자원했고, 이 가운데 마리우스도 포함됐다. 전방 지역으로 나간 정찰대는 3곳을 점검해야 했다. 정찰대가 세 번째 점검 지역에 도착한 26일 새벽 1시15분 중공군의 총성이 울렸다. 정찰대와 지휘부의 연결이 갑작스럽게 끊겼다. 정찰대를 지원하기 위한 대기 부대가 곧바로 세 번째 점검 지역으로 향했다. 대기 부대가 도착할 무렵 정찰대와 중공군과의 전투는 마무리된 상태였다. 이 전투로 14명 중 마리우스를 포함한 5명이 전사했다. 4명은 상처를 입었다. 2명은 포로로 잡혔다. 전투로 기진맥진한 병사 3명만 철수했다.

“네덜란드 한국전쟁 참전용사 가운데 생환한 드 부이저 씨가 오빠의 전사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오빠와 함께 마지막 정찰을 하러 갔던 드 부이저 씨는 오빠에게 ‘햄페르셔(마리우스의 애칭), 무슨 소리 안 들리냐’고 물었고, ‘잠깐, 조심해’라고 외쳤습니다. 잠시 후 오빠의 머리로 적군의 총알이 날아왔고, 오빠는 그 자리에서 전사했습니다. 드 부이저 씨는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뒤 저와 우리 가족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줬습니다.”

정찰만 80회 이상 수행했을 정도로 이런 작전에 익숙했던 20살의 청년 마리우스는 그렇게 다시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부산 남구의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생환해 마리우스의 이야기를 전했던 드 부이저 씨도 2018년 10월 28일 영면했다. 이듬해 3월 12일 드 부이저 씨는 마리우스 등 네덜란드 전우가 묻힌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 자랑스러운 큰 오빠

마리우스 마지막 정찰을 기록한 자료.
마리우스가 전사하고 두 달 뒤인 9월 19일 네덜란드 집으로 그의 유품이 도착했다. 이 유품에는 동생에게 주려고 준비한 태엽이 달린 오리 장난감, 나무로 만든 배 등이 있었다. “오빠의 선물을 봤을 때 저는 어린 마음에 좋았어요. 어머니는 달랐죠. 이런 선물 대신 아들이 돌아오길 바라셨어요. 어머니의 상심이 정말 컸습니다.”

티니는 이 유품 가운데 마리우스의 작은 성경책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그는 2016년 1월 13일 유엔기념공원에 방문해 마리우스의 묘 앞에서 시편 23편을 읽었다. “오빠가 전쟁터에서 전투를 치르기 전 군 목사에게 이 구절을 자주 읽어달라고 했답니다. 종교적 믿음이 강했던 오빠는 어떤 메시지가 필요한지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어 티니가 이 구절을 나지막하게 읽었다.

티니는 생전에 기록된 마리우스의 목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네덜란드 군은 1952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모든 병사의 목소리를 녹음해 가족에게 보냈다. 티니는 레코드에 기록된 마리우스의 목소리를 현재 시디에 복사해 보관하고 있다. 여기서 마리우스는 가족에게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길 바란다. 나는 잘 지낸다. 나는 다음 크리스마스를 네덜란드 집에서 건강히 잘 보내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티니는 마리우스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잊지 않았다. “오빠에게 더는 얘기할 수 없지만, 오빠가 자유로운 한국을 위해 희생한 게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오빠의 노력 덕분에 한국 사람이 평화 속에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네덜란드=김진룡 기자 jryongk@kookje.co.kr

영상=김태훈 PD

※제작지원 : BNK금융그룹

※취재협조 : 재한유엔기념공원관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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