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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 참전 뒤 트라우마로 힘든 여생…전쟁고아 연민도 깊었죠”

UN공원에 잠든 용사들…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2 <8> 호주군 故 로널드 퍼시 호어

  • 김진룡 기자 jryongk@kookje.co.kr
  •  |   입력 : 2023-06-26 20:03:22
  •  |   본지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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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으로 6·25 발발 2년뒤 참전
- 배 얼어붙는 한파가 최대의 적
- 청력 저하 겪고 외상후 스트레스
- 마음의 병 치료 않고 홀로 감내

- 고향선 내향적 성격의 아버지
- 군시절 보낸 아시아 여행 가면
- 자유로운 사람으로 변하더라

“아버지는 한국전쟁 중 대연평도 고아원을 찾아 고아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습니다. 전쟁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저에게 ‘그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정말 추웠다. 그들이 견뎌야 했던 상황을 보면 우리는 운이 좋다’고 이야기하셨죠.”

호주 멜버른의 교외 지역인 웨리비에서 만난 린넬 호어(여·63)가 아버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에는 해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의 아버지 로널드 퍼시 호어가 대연평도 고아 2명을 안고 있었다. 전쟁 중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해 보였다.
린넬 호어의 아버지 로널드 퍼시 호어가 대연평도에서 고아 2명을 안고 있는 모습. 린넬 호어 제공
1952년 6월 아버지는 호주 해군의 호위함인 ‘HMAS Condamine’을 타고 싱가포르 일본 등을 경유해 한국을 찾았다. HMAS Condamine 소속 해군은 그해 크리스마스를 맞아 초콜릿 사탕 비스킷 장난감 등을 마련해 대연평도 고아원을 찾았다. 일부 해군은 고아들에게 양말을 선물했고, 겨울용 니트를 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 한국인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자주 이야기했어요. 대연평도 고아원에 관한 이야기도 해줬습니다. 한국에 남아 있는 게 없었고, 고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아느냐 물어보기도 했죠. 아버지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습니다.”

■강추위와 사투

북한의 동해안 쪽에서 찍은 얼어 붙은 호주 해군 호위함 ‘HMAS Condamine’. 린넬 호어 제공
1928년 3월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 서호주의 퍼스에서 자랐다. 드넓은 인도양과 맞닿은 도시였고, 아버지도 바다에 매일 갈 정도로 좋아했다. 10대 중반 학교를 그만둔 아버지는 철도회사에 취업했다. 오래가지 않아 아버지는 퇴직했고, 1946년 9월 해군에 입대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아버지는 2년 뒤에 HMAS Condamine을 타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아버지는 호위함에서 통신 운용 등을 맡아 모스부호로 육지와 소통하는 일을 했다. HMAS Condamine 주된 임무는 육지 포격과 기뢰 제거였다. 기뢰 제거 작업은 전쟁에서 위험한 활동 중 하나로 꼽힌다. 이들이 맞이한 강력한 적은 따로 있었다. 바로 강추위였다. 린넬은 당시 얼마나 추웠는지를 보여주는 사진 몇 장을 꺼냈다.

“바다가 얼어 있고, 배의 갑판 위도 모두 꽁꽁 얼었습니다. 배에 장착된 무기들도 추위에 얼어붙었죠. 아버지는 전쟁 상황에 불평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엄청난 추위를 이야기했습니다. 선체 내부에 온도 조절 기능이 없어서 적도 국가에서는 오븐처럼 더웠고, 한국에서는 꽁꽁 얼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해군이었던 덕분에 별다른 부상 없이 1953년 4월 귀국했다. 이후 아버지는 1957년 5월 말레이시아 비상사태 때 참전하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비상사태는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말레이시아 공산당의 무장단체가 영국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펼친 게릴라전이다. 당시 영연방 국가였던 호주도 이 전투에 참전했다. 아버지는 이곳에서 10개월 정도 임무를 마치고 다시 호주로 돌아왔다. 이후 전역한 아버지는 관공서에서 여러 직무를 맡아 일했다.

■아버지를 괴롭힌 마음의 병

노년의 로널드 퍼시 호어. 김태훈 PD
전쟁터에서 자주 총과 포탄 소리를 듣다 보니 아버지의 청력은 좋지 않았다. 더 나빴던 것은 아버지의 정신 건강이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받은 스트레스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상 정신병으로 취급받을 수 있어 언급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린넬은 아버지에게 PTSD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와 관련해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분명히 어딘가 아픈 것 같은데 아버지는 내색하지 않았다. 2015년 린넬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는 상당히 내성적으로 변했다. 아버지는 끔찍한 불면증을 겪기도 했고, 텔레비전이 고장나는 등 아주 사소한 일에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꼈다. 그렇게 아버지의 병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55세 때 이미 호주 정부로부터 ‘TPI(Totally and Permanently Incapacitated)’로 대우받았습니다. TPI는 영구적으로 일할 수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아버지 세대에서는 정신 질환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어려웠습니다. 아버지도 저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죠. 그런데 2021년 1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의 침실에서 PTSD와 관련된 기사가 벽면 전체에 덮여 있는 걸 봤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린넬은 가끔 아버지가 전쟁에 가지 않았다면 어떠했을지 상상했다. 청춘을 전쟁터에서 보낸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으로 자랐겠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아버지가 많이 바뀌지 않았으면 합니다. 스트레스만 조금 없었으면 하는 게 바람이었죠.”

■싱가포르에서 우연히 만난 아버지

린넬 호어가 인터뷰하는 모습. 김태훈 PD
린넬은 15살 때 사춘기로 방황했고, 독립을 선택했다. 1970년대 반전 시위가 많았고, 린넬도 자연스럽게 ‘히피’가 됐다. 이런 성향 탓에 아버지와 잦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와 싱가포르에서 우연히 만나면서 둘의 관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가 가끔 한국 일본 홍콩 말레이시아 등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곤 했어요. 어릴 적 꿈꿨던 이국적인 장소였죠”라며 “20대 후반 그렇게 아버지의 사진 속 장소를 찾기 위해 싱가포르로 떠났습니다. 한 음식점에서 밥과 술을 먹으며 놀고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나타났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는 혼자 여행 중이었죠. 성인이 된 후 그때 아버지와 처음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이후부터 좋은 친구가 됐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아버지와 아시아 여행을 다니면서 추억을 쌓았습니다. 호주에 있을 땐 내향적이었던 아버지가 해군 시절을 보냈던 아시아 여행만 가면 자유로운 사람이 됐던 게 기억 난다”고 덧붙였다.

린넬이 인생을 놓고 방황하던 때 길잡이가 된 것도 아버지였다. 린넬은 한국과 아시아 여러 나라의 이야기를 해줬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다문화권 교육과 관련된 전공을 택했다. “호주 명문대 중 하나인 멜버른대에 진학해 호주의 교육 시스템을 동양으로 전파하는 일을 했습니다. 박사까지 마치고 교육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호주 교육을 싱가포르에 도입하는 걸 주로 했죠.”

2020년 1월부터 호주도 코로나19를 겪으며 모든 곳에 봉쇄령이 내려졌다. 이 시기 가족이 못 만나는 때가 허다했다. “저는 코로나19 봉쇄 때문에 오히려 아버지와 함께 오랜 시간 같이 있을 수 있어 행운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내가 떠난 후에도 항상 너를 사랑할 거다’고 말해주셨죠.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저도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고, 최고의 친구가 돼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호주 멜버른=김진룡 기자 jryongk@kookje.co.kr

영상=김태훈 PD

※제작지원 : BNK금융그룹

※취재협조 : 재한유엔기념공원관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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