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부산 최대 부랑인 시설 ‘영화숙’‘재생원’의 원장 이순영은 음성나환자촌 ‘성화원’ 원장을 겸했다. 이 원장은 이곳에서도 폭행과 강제노역 등 인권침해를 일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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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신문(당시 국제신보) 1970년 1월 25일 자 7면에 보도된 성화원 습격 사건. 이순영 원장은 영화숙과 성화원을 동시에 운영했다. 당시 성화원 수용인들은 이 원장이 구호물품을 횡령했다며 경찰에 그를 고발했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 원장의 동생이 영화숙 수용인을 이끌고 성화원을 습격하는 등 난동을 부린 것으로 소개돼 있다. 국제신문 DB |
13일 한센인피해사건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성화원은 1953년 낙동강변 모래톱 지역에 한센인 280여 명을 수용하면서 생겨났다. 같은 해 한센인 50여 명과 사하구 구평동 산비탈로 자리를 옮겼다. 이들을 모은 건 이종남 전 민주당 경남도당 선전부장이다. 1958년 부산진갑 등에서 당선되는 등 세 차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 원장과는 일가친척이다. 이 원장은 1957년 이 전 의원이 밀수 혐의로 구속되면서 직을 맡았다.
성화원은 자치회·교도부·의료부·작업부 등으로 구성돼 운영됐다. 당시 별다른 생계 수단이 없었던 한센인들은 거리로 나가 구걸해야 했다. 이들의 입·퇴원을 관리하는 교도부는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이들만 골라 입원을 허락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원생은 폭력을 동원해 집단촌 밖으로 강제로 퇴출시켰다. 원생들은 이곳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구타와 가혹 행위를 참아내야 했다. 패악을 일삼은 교도부 직원 절반은 영화숙에서 동원됐다.
이 원장과 그 수하들은 도로 건설이나 농사와 같은 일에 한센인들을 투입했다.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채찍을 휘갈기거나 구둣발로 사정없이 짓밟기도 했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여성 원생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그런데도 이곳에서의 참상은 철저히 은폐됐다. 부산의 외곽, 비탈진 산에 자리 잡은 지리적 특수성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이 원장은 각종 구호물을 착복해 되팔기 바빴다. 원생들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돌아온 건 영화숙 원생을 동원한 집단 린치였다. 영화숙이 공식적으로 문을 닫은 1972년 이후에도 이 원장은 1970년대 후반까지 ‘장림기업목장’ 대표이사를 지내는 등 공짜 노동력으로 부를 쌓았다고 한센인피해사건진상규명위원회가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