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 때 진압 경찰에 폭행당해 기절한 한 남성이 자신을 구해준 고등학생과 수십 년 만에 직장에서 재회했다. 타지에서 우연한 계기로 친분을 쌓은 동생이 바로 그날 거리에 쓰러진 자신을 병원까지 데려간 생명의 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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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대 부마민주항쟁 기념비. 국제신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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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및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는 24일 정남진(64·경북 포항시) 씨를 항쟁 상이 피해자로 인정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지난 17일 열린 제77차 본회의에서 이같이 심의·의결했다.
정 씨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는 1979년 10월 18일 부마항쟁 때 경남 마산(현 창원시)에서 경찰이 저지른 국가폭력에 휘말렸다. 당시 22세의 청년이었던 그는 초·중·고교에 시험지를 배달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날도 배달을 위해 거리에 나선 정 씨는 당시 신마산역 인근에서 일어난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던 경찰을 목도했다.
그의 눈에 비친 경찰은 무자비 그 자체였다. 그들은 최루탄의 하얀 연기로 거리를 가득 메우고는 시민을 향해 마구 곤봉을 휘둘렀다. 피 흘리며 쓰러진 시민의 머리채를 붙잡고는 연행 차량까지 가축처럼 질질 끌고 갔다. ‘어떻게 다친 사람에게 저럴 수 있느냐’는 마음에 피가 끓은 정 씨는 경찰의 곤봉을 빼앗아 저지하는 등 다친 시민을 구하려 애썼다.
시민을 지키려던 그 역시 경찰의 곤봉을 피할 수 없었다. 머리를 맞은 그는 바닥에 뉘어져 연신 구둣발에 짓밟혔다. 이가 3개 부러지고 왼팔이 골절된 그는 기절한 채 한참을 쓰러져 있었다. 경찰은 의식이 없는 그를 경찰서, 병원으로도 데려가지 않았다. 홀로 방치된 그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 그에게 고등학생 서너 명이 다가왔다. 이들은 정 씨가 의식을 차리도록 한 뒤 그를 마산 성모병원 근처까지 부축했다. 무사히 병원에 도착한 정 씨는 이 고등학생들에게 고맙다는 말도 전하지 못했다. 혹여 병원 측이 경찰에 폭행 피해자가 왔다고 신고해 뒤늦게 연행될까 두려웠다. 정 씨는 깁스 같은 응급 처치만 받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후 정 씨는 자신이 항쟁에 휘말렸다는 사실을 철저히 감춘 채 생계에만 전념했다. 항쟁 때 경찰에게 맞았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정 씨는 1981년에는 마산을 떠나 울산을 거쳐 포항에 새 둥지를 틀었다. 1988년부터는 지역 대기업의 계열사에서 임원 운전기사로 일했다. 당시 그는 이 기업의 하청 경비업체에 다니던 동생뻘 지인 A 씨와 자주 어울렸다. 자신의 고향인 마산 말씨를 쓰는 그가 유독 반가웠다.
두 사람의 인연은 같은 고향 출신 지인에서 그치지 않았다. 10여 년 전 어느 날, A 씨와 함께 술을 마시던 정 씨는 오랫동안 숨겨온 그 날의 기억을 들려줬다. A 씨라면 믿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참 정 씨의 말을 듣던 A 씨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형님, 그 사람 접니다.”
처음에 정 씨는 A 씨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진 A 씨의 설명을 듣고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밖에 믿을 수 없었다. 마산상고 학생이었던 A 씨는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신마산역 인근을 거닐던 중 경찰의 시위 진압 장면을 목격했다. 당시 한 남성이 거리에 쓰러져 있었는데, 낯이 익은 사람이라 지나칠 수 없었다고 한다. “학교 다닐 때 우리 학교에 늘 시험지를 배달해주던 분이 그날 피를 흘린 채로 기절해 있기에 친구들과 도와줬습니다. 얼굴을 아는 사람이었거든요. 그게 형님이었다니!”
정 씨가 진상규명위에 피해를 신청한 데도 A 씨의 권유가 있었다. A 씨는 그 때 당한 피해를 숨길 필요가 없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고 정 씨를 설득했다. 정 씨는 “40여 년 전 나를 구해준 데 이어 이번엔 명예를 회복하는 것도 도와줬다. 지금은 막역한 형 동생 사이로 지내고 있다. 그는 내 인생의 은인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