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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둔 얘기를 터놓는 '인생현상소' <3> 대학생 전해정의 ‘은혜’

“할머니 70년 만의 고향찾기 여행… 가슴 벅찬 동행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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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매일 마산~부산 오가며
- 맞벌이 부모님 대신 날 키웠죠
- 이젠 할머니와 여행 다니며 보은

- 광복 전 태어나 자랐다는 일본땅
- 기억 더듬고 현지 기록들 뒤져
- 도착한 어촌서 할머니 싱글벙글
- 돈 벌어 크루즈 태워 드릴게요
- 건강하게 오래 내 곁에 있어줘요

부산대 4학년 전해정(26·중어중문학과) 씨는 여행 마니아다. 수영 강사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으로 26개국을 다녀왔다. 태국 푸켓에선 스쿠버다이빙 강사로도 일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은 외할머니 황영순(86) 씨와의 동행. 해정 씨가 할머니와의 추억을 기록하고 싶다며 ‘인생 현상소’ 문을 두드렸다. “외할머니가 태어난 일본 에이가시마를 포함해 해외여행 4번과 국내여행 1번을 함께했어요. 걷기도 하고 때로는 스쿠터도 타면서.” 손녀가 쓴 편지에는 의젓함이 가득찼다. “엄마 아빠 맞벌이 때문에 어릴 때부터 20년 넘게 나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우리 할머니. 이제는 할머니 하고 싶은 것 모두 해드리고 싶어요. 마음 같아선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데…. 오랫동안 건강하게 옆에 있어 주세요. 사랑해요.”
   
해외여행 때마다 사온 기념 자석을 붙인 문 앞에서 할머니 황영순(왼쪽) 씨와 손녀 전해정 씨가 활짝 웃고 있다.
해정 씨는 경남 마산(창원시)의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매일 마산에서 부산을 오가며 해정 씨를 돌본 할머니는 해정 씨의 26년 지기 ‘절친’이자 ‘선생님’. “초등학교 1학년 때 받아쓰기에 20점을 맞은 적이 있어요. 엄마가 어찌나 혼을 내시는지 받아쓰기가 두려웠어요.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할머니가 글자쓰기나 구구단을 꼼꼼히 가르쳐 주셔서 2학기 때부터는 시험을 잘 봤습니다. 커서도 시험 치는 날 아침에는 할머니와 하이파이브를 해요. 손이 미끄러지면 시험을 잘못치는데 손이 잘 맞으면 성적이 잘 나와요. 대학수학능력시험 때도 하이파이브 덕분에 원하는 학과에 진학한 것 같아요. 진짜 신기하죠.”

할머니에게 미안한 적도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로 기억해요. 친구들은 젊은 엄마와 왔는데 저는 맞벌이 하는 엄마 대신 할머니가 김밥을 들고 오셨거든요. 어린 마음에 할머니를 밀치고는 ‘집으로 가라’고 했어요. 그때로 돌아간다면 꼭 안아드리고 싶어요.” 지금은 해정 씨가 할머니를 끔찍하게 챙긴다. 마산에 홀로 사는 할머니와 함께 산다. 부산대까지 1시간이 넘는 통학시간을 감내한다. “제가 스무살이 되던 해 할머니가 마산에서 혼자 살게 됐어요. 그런데 연세가 드시면서 밥도 잘 안 챙겨 드세요. 건망증도 점점 심해지시는 것 같고. 그래서 엄마랑 같이 마산으로 이사해 할머니와 살아요. 제가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한 밥 아니면 잘 안 먹었거든요. 요즘은 밥 맛이 납니다.”

   
해정 씨가 할머니와 첫 해외여행을 떠난 건 중국에서 유학(교환학생) 하던 2018년 6월. 손녀와 영상통화를 하던 할머니가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들려줬다. “일본에서 살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11월 귀국했어. 귀국했을 때는 한국말도, 일본어도 제대로 하지 못해 선생님께 늘 매를 맞곤 했지. 그때 9살이었어. 한국에 온 뒤로는 태어난 곳을 한 번도 가지 못했지. 어릴 적 태어나고 자란 ‘에가시마’가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구나.” 그렇게 할머니 ‘고향 찾기 여행’이 시작됐다. “할머니가 기억하는 고향의 단서는 두 가지였어요. 첫 번째는 ‘에가시마’라는 지명. 두 번째는 할머니가 다니던 초등학교 앞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 지명을 듣고 인터넷에 검색했더니 정확한 명칭은 ‘에가시마’가 아니라 ‘에이가시마’였어요. 에이가시마 위성사진을 띄워놓고 바닷가 근처 초등학교 두 곳을 찾았어요. 바로 일본행 비행기를 타러 갔죠.”

26개국을 혼자 다니던 해정 씨는 이때 처음으로 할머니와 함께 해외여행을 갔다. “저는 원래 여행을 좋아해요. 그래서 혼자 26개국을 돌아다녔죠. 이때까지는 저의 재미와 경험을 위해 즐겼지만, 나를 이렇게 혼자서 배낭여행으로 세계를 다닐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준 사람은 할머니입니다. 그런 할머니를 위해서는 정작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더라고요. 그게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

일본에 도착한 해정 씨는 첫 번째 초등학교로 갔다. “교장실에 들러 문의했더니 제2차 세계대전 이전 기록은 없어 정확한 개교 연도를 알 수 없었어요. 개교일이 1946년이면 할머니의 연세와도 맞지 않고. 다행히 교장 선생님에게 고급 정보를 얻은 게 행운이에요. 1887년 개교한 두 번째 학교 앞이 매립하기 전에는 바다였다는 사실을 들었거든요.”

   
할머니의 고향인 ‘에이가시마’ 앞 바다에서 할머니 황영순(왼쪽) 씨와 손녀 전해정 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다음날 해정 씨와 할머니는 에이가시마역으로 갔다. 에이가시마 역에서 나와 바닷가로 걸어가자 할머니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바닷가에 놓인 큰 돌들을 보고는 “고향이 맞다”고 확신했다. “할머니가 어릴 때 큰 돌이 바닷가에 많았다고 기억을 떠올렸어요. 어릴 때 나무 판자를 들고 수영하러 갈 때면 늘 큰 돌이 계단처럼 보였다고. 70년 만에 고향을 찾은 할머니는 바닷물로 손을 씻고는 한참을 한참을 앉아계셨어요.” 할머니는 학교를 찾으러 돌아다니며 힘든 와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고향에 왔다며 연신 좋아하던 할머니의 표정을 해정 씨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해정 씨는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중국으로 할머니를 초대했다. 베트남 여행에선 할머니와 수영을 했다. 제주도 여행에선 스쿠터를 타고 돌아다녔다. “할머니는 50대 후반에 할아버지와 유럽 일주도 한 멋쟁이세요. 그 후 20년 넘게 저를 키우신다고 여행 한번 못 가셨어요. 그게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지금은 ‘여행 메이트’가 돼서 너무 좋아요. 할머니는 여행 다녀올 때면 늘 동네 할머니들에게 기념품을 나눠주며 자랑해요. 그럴 때마다 동네 사람들이 ‘효녀’라고 칭찬해주세요.”

할머니는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손녀의 볼을 어루만지며, 혹여 손녀가 배고플까 간식거리와 마실 것을 가득 담은 쟁반을 올려두고 갔다.

해정 씨는 할머니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했다. “할머니가 기억력이 떨어지면서 했던 말을 또 할 때가 있어요. 철 없을 때 짜증을 냈던 게 많이 미안해요. 할머니가 모든 것을 잊어도 저만은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제가 돈을 많이 벌어서 크루즈나 슈퍼카도 태워드리고 싶어요. 그때까지 건강하게 오래 사시라고 꼭 전하고 싶어요.”


※인생현상소 사연 모집

▷신청대상 : 부산·울산·경남 거주자 누구나 ▷신청기간 : 연재가 끝날 때까지 ▷응모방법 : 국제신문 이메일(inews@kookje.co.kr), 우편발송(부산시 연제구 중앙대로 1217 국제신문 5층 디지털국). 형식자유, 이름·나이·연락처 기재 ▷문의 : (051) 500-5249

※함께 제작된 동영상 인터뷰는 유튜브 ‘국제신문’ 채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제작지원 : BNK

글=정채영 PD, 사진=박희진 동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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