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해자협회 316명 증언서 분석
- 63%가 후손과 함께 병마 고통
- 2세들 발병률은 일반인 수십 배
- 취업 등 불이익 우려 피폭 쉬쉬
- 10명 중 1명 “사회적 차별 받아”
일제강점기 경남 합천에서 징용된 사람들은 일본 히로시마에서 강제 노역했다. 합천에 피폭자의 쉼터인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있는 이유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는 2019년부터 피폭 1세를 대상으로 자신과 후손(2세)의 건강상태가 포함된 ‘피폭자 증언서’를 수집 중이다. 올해 8월까지 473명의 ‘증언’을 확보했다. 국제신문은 심진태 합천지부장의 도움을 받아 개인정보를 제외한 증언서를 단독 입수했다. 내용을 알아보기 힘들거나 신빙성이 떨어지는 157건을 제외하고 316건을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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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진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이 경남 합천군 원폭피해자 위령각을 소개하고 있다. 매년 8월 6일(원폭투하일)이면 이곳에서는 원폭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가 열린다. 김채호 기자 chaeho@kookje.co.kr |
■ 63% “1·2세 동시에 아프다”
증언서를 낸 피폭 1세(316명) 중 최소 한 가지 이상의 질병을 앓는 이는 232명(73.4%)으로 집계됐다. 이중 146명(62.9%)은 “후손(2세)도 아프다”고 기술했다. 1세가 관찰한 피폭 2세의 건강 문제로는 ▷기타질병(어지럼증·두통 등)이 31.5%로 가장 많았다. ▷피부질환(11.6%) ▷근골격질환(6.1%) ▷고혈압(6.1%)을 앓고 있다고 증언한 이도 많았다. 이는 증언서를 남긴 피폭 1세 1명당 1명의 후손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의 수치다. 피폭 2세는 1세보다 약 3.5배 정도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실제 질병에 시달리는 2세의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원폭 피해자 A 씨의 증언은 생생하다. 그의 큰 아들은 10여 년 전 사망했다. 사인은 간암.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전국의 용하다는 한의원이나 병원을 수도 없이 찾았으나 소용 없었다. A 씨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눈 질환을 앓았다고 했다. 치아 상태도 좋지 않아 군데군데 이가 흔들리고 빠졌다. A 씨는 자신도 아들과 비슷한 증상을 겪었다고 증언했다. “눈에 심한 고통을 경험했다. 망막이 흐려지고 눈이 충혈됐다.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날 정도였다. 잇몸이 약해서 이가 깨지고 빠졌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손·발톱이 뒤틀리고 툭하면 동상에 걸렸다. 심지어 군데군데 살갗이 벗겨지기까지 했다. 아내도 나와 증상이 비슷했다. 심지어 아이를 2번이나 사산하기도 했다. 아내는 큰 아들이 죽고 몇 년 뒤 숨졌다. 아내는 죽는 순간까지 아들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가슴이 아린다. 나도 큰 아들이 어릴 적부터 겪었던 고통이 나 때문이라고 믿는다.”
A 씨는 1945년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히로시마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 마을 친구·형님들과 강제 징용됐다고 한다. 합천지부가 수집한 증언서에는 수 많은 원폭피해자 1세가 자신의 아들·딸이 겪는 질병을 구체적으로 적었다. “자식들이 고혈압·뇌경색에 걸렸다” “아들 딸이 젊은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 “큰 아들이 원인 모를 면역결핍증·피부병·고혈압에 걸려 괴롭다” 등의 내용이다. A 씨는 증언서에 “피폭 2세가 마음껏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증언서를 제출한 한 남성(29번)은 자신의 질병이 자녀에게 유전되는 ‘피폭의 대물림’을 의심했다. “천식을 앓고 있다. 3남매 중 아들이 천식이 있다. 다른 자식들 역시 다양한 질병에 걸린 상태다.” 여성-53번은 ‘내가 잔기침에 시달린다. 아이들도 잔기침과 잔병치레가 많다’고 했다. 여성-75번은 ‘아이도 나처럼 어지럼증과 심장질환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증언서에는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2세의 사연도 많았다. 여성-184번은 ‘둘째를 사산했다. 넷째 아이는 5살 때 혼수상태가 돼 숨졌다’고 증언했다. 남성-200번은 ‘첫째 아이를 생후 3개월 만에 잃었다. 소아마비를 앓던 셋째는 23살에 사망했다’고 적었다. 여성-254번은 ‘5남 2녀 중 셋째 아들의 건강이 좋지 않다. 넷째 아들의 손자가 정신 장애가 있다. 큰 딸은 난임으로 시댁의 구박을 받았다’고 했다. 김익중 전 동국대 의대 교수는 “원폭 피해 유전은 이미 입증됐다. 유전자가 손상되고, 이 손상된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건 의학계에서 광범위하게 받아 들이는 상식”이라며 “일부 원자력계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유전성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 부모 피폭 사실 숨기는 후손들
2005년 국가인권위 실태조사에선 ‘어린 나이에 사망한 피폭 2세’의 존재가 드러났다. 당시 인권위가 피폭 1세 1092가구의 자녀 4080명을 분석했더니 299명(7.3%)이 사망한 상태였다. 이 중 10살이 되기 전 사망자는 52.2%에 달했다. 또 피폭 2세 1226명을 우편 설문조사한 결과 원자폭탄 피해자의 2세 남성이 앓고 있는 질병은 같은 연령대의 일반 국민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빈혈은 일반 국민 평균의 88배였고 ▷심근경색·협심증 81배 ▷우울증 65배 ▷천식 26배 ▷정신분열증 23배 ▷갑상선질환 14배였다. 2세 여성 역시 ▷심근경색·협심증이 89배 ▷우울증 71배 ▷유방양성종양 64배 ▷천식 23배 ▷빈혈 21배로 조사됐다.
심진태 원폭회 합천지부장은 “원폭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사실을 숨긴다. 특히 2세들은 결혼·취업 등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부모의 피폭 사실을 숨긴다”고 말했다. 실제 증언서 내용을 보면 이러한 내용이 드러난다. 남성-51번은 ‘원폭 피해 2세라는 점 때문에 장남의 결혼에 지장이 있었다’고 썼다. 피해 1세 중에서 2세의 고통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많았다. 여성-194번은 ‘자녀와 손자들의 피부질환이 심하다. 아들 두 명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나 때문인가 싶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2019년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실태조사를 보면 원폭 피해자 1세는 11%, 2세는 9.5%가 피폭과 관련해 사회적 차별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증언서를 제출한 피폭 1세에게 가장 흔한 질병은 근골격계 질환(114명·36%). 그 뒤를 고혈압 등 만성 질병(17%)과 당뇨(8.8%) 갑상선 질환(6%) 순이었다. 피폭 1세는 1945년 8월 6일 이전에 태어났거나 피폭 당시 태아를 뜻한다. 현재는 대부분 노령이라 노환으로 인한 질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상당수 피폭 1세들은 원폭 피해에 따른 질병 발생을 강하게 의심한다. 남성-76번은 ‘원폭 당시 연기를 많이 마셨다. 이후 기침과 통증이 심하다’고 증언했다.
여성-159번은 ‘한쪽 눈이 아파서 병원에 갔으나 원인을 알 수 없다. 병원에서는 피폭 30년 이후에도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고 적었다. 여성-301번은 ‘피폭 당시 고막을 다쳤는데 치료를 받지 못했다. 염증이 생기고 고막이 파열된 상태’라고 기술했다. 여성-332번은 ‘피폭 당시 다리를 다쳐 뼈를 깎아내는 수술을 받았다. 10년 넘게 정형외과 약을 먹는다’고 했다.
김준용 기자 jykim@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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