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는 해양수산부 장관을 비롯해 대학 2곳의 총장을 지내고 부산시장으로 선출되는 등 국가와 사회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권력에는 상응하는 책임이 따릅니다. 피고와 같이 권력을 누리는 사람에겐 더 높은 책임감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피고는 오히려 우리 사회가 피고에게 부여한 지위를 이용해 이 사건 각 범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책임을 저버렸습니다.”
29일 부산지법 301호 법정에서 열린 오거돈 전 부산시장 강제추행 사건 선고공판에서 형사6부(류승우 부장판사)는 이 사건을 ‘권력형 성범죄’로 규정하고 오 전 시장을 질타했다.
●“상해 예견 가능, 인지에도 문제없어”
이번 재판에서 가장 관심을 모았던 대목은 검찰이 피해자의 심리적 외상 문제를 들어 적용한 ‘강제추행치상’ 혐의가 인정될지 여부였다.
강제추행에 따른 상해 혐의가 인정되면 적어도 5년 이상 징역형이 내려질 것으로 예상돼 오 전 시장의 변호인 측은 혐의 4가지 가운데 강제추행치상 혐의만큼은 강하게 부인해왔다.
결심공판에서도 변호인들은 예견하지 못했던 만큼 치상 혐의를 인정하기 어려우며, 이 경우 향후 모든 강제추행 사건 피의자는 치상 혐의를 함께 받게 될 수밖에 없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해자는 업무를 수행하던 중 무방비 상태에서 조직의 장으로부터 추행을 당했다. 매우 치욕적인 일”이라며 “범행으로 인한 피해자의 충격이 인정되며, 이것이 영구적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경험칙에 비춰 충분히 수긍된다”고 밝혔다. 이어 “이 사건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나 수사 장기화 등은 모두 피고의 지위 등에 따른 것으로 피고가 이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오 전 시장 측 인지능력 장애 등 주장에 대해서는 “피고 측 제출 자료에 비춰 피고가 당시 범행에 영향을 줄 정도의 인지능력 장애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피고의 지위 등을 고려할 때 ‘2차 가해’ 등은 예견될 수 있었다. 범행이 피해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발생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더라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따라서 강제추행과 상해 사이에 인과관계 및 예견 가능성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책임 저버린 권력형 성범죄”
재판부는 오 전 시장이 그간 국가와 사회에 기여한 사실을 유리한 양형 요소로 고려해달라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류 부장판사는 “오히려 피고는 지위를 이용해 범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권력에 따른 책임을 저버렸다”고 밝혔다. 이어 “피고가 범행 당시 지위로부터 나오는 위세를 노골적으로 행사하지는 않았다”면서도 “피해자 중 한 명은 적극적으로 항의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스스로 사직하는 방법으로 피고에게서 벗어났다. 다른 피해자는 자유의사가 제약돼 범행이 이뤄지는 동안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이는 피고 권력에 기인한 월등히 우월한 지위에 따른 것으로 권력에 의한 추행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류 부장판사는 다만 “피고가 피해자 의사를 반영해 사퇴한 점을 포함, 피고의 연령과 환경, 동기 등을 양형에 참작했다”고 덧붙였다.
선고가 끝난 뒤 피해자 측 변호인 법무법인 민심의 최황선 변호사는 “형량 자체는 아쉽지만, 오 전 시장 측이 주장한 고령 등 요인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며 “1심 재판부가 이 사건을 권력형 성범죄로 공인했다. 오늘 선고는 각 공공기관의 유사한 권력형 성범죄 사건을 예방하는 사회적 경종이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민주 기자 min87@kookje.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