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란에 군사들 침입·약탈 계속
- 아이 등 무고한 백성도 피 흘려
- 나라가 그들 못 지켜주니 참담
- 대관림서 만난 약초캐는 사내
- 산삼 제값 팔 곳 없어 술로 담아
- 발효주로 향도 깊어 치원 감탄
천령군(현 함양군) 백성들은 치원이 고을 외곽으로 물길을 돌리고 대관림(大館林·지금의 상림)을 조성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홍수에 시달렸다. 홍수가 한 번 휩쓸고 지나가면 평안하던 삶은 하루아침에 피폐해지고 다시 일상을 찾으려면 몇 달, 때로는 이듬해 수확을 얻기까지 배를 곯기도 했다. 어디 홍수뿐인가. 가뭄과 같은 천재지변은 물론 역병이 휩쓸어도 백성은 하늘을 원망하다 결국은 나라에 원성을 돌리게 된다. 나라의 주인을 자처한 자와 그 수족이 되어 다스린 자들은 당연히 그 원성을 감당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백성이 주인은 못 된다 할지라도 주인이라는 이름에 많은 것을 바쳐왔으니 보호받을 자격도 책임을 물을 권리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예측할 수 없는 재해도 그러하거늘 전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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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치원의 위민과 애민의 마음이 담긴 상림은 천년을 넘게 지켜오면서 계절마다 아름다운 옷으로 바꿔 입고 사람들을 반긴다. 가을의 상림은 특히 아름답다. 함양군 제공 |
곳곳에 전란의 상흔이 생생하다. 요충지는 아니니 큰 전투는 아니었을 테지만 순순히 내줄 리 없지 않은가. 그렇더라도 관리나 군사야 대적하고 피를 흘리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해도 노인과 아이, 부녀자 같은 무고한 백성은 무슨 죄란 말인가. 그저 논밭 일구고 밥 짓고 철없이 뛰어놀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군사에 죽고 피 흘리고 불태워지고 약탈당해 재해보다 더한 참화에 넋 잃은 모습이라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을 원망할 수 없는 오직 나라의 죄다!
주인을 자처하며 백성에게 바치라 하고 빼앗았으면 어떻게든 피는 흘리지 않게 해야지 실정이라는 빌미를 잡히고, 도발하는 적을 막지도 못하니 이 지경이 되지 않는가. 그렇다고 저들은 다른가. 내세우는 기치의 명분은 번듯하지만 백성의 목숨과 평안 따위는 안중에 없으니 결국 명분은 허울일 뿐 권력을 탐하는 것이지 않은가. 그러니 새 나라라 한들 무엇이 달라지랴.
관림으로 들어서니 군데군데 허기진 아이들이 기운 없이 늘어져있거나 노인과 부녀자들이 먹을 나물거리라도 찾는 듯 수풀 사이를 뒤지고 있다. 치원은 자신도 관리로 살아왔으니 죄인이기는 마찬가지라는 심정에 우울하다.
■뱀·해충에게 지성으로 고하니
해가 지고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 치원은 비로소 편하게 관림을 걷는다. 그날, 어머니가 숲속의 뱀에 놀라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돌아오시던 날이 불현듯 떠오른다. 어머니는 그날 밤 잠결에도 고함을 몇 번이나 지르셨다. 다음 날 새벽 치원은 흰색 도포를 차려입고 관림으로 갔다.
희뿌연 안개로 자욱한 관림 숲 가운데에서 치원은 눈을 감고 두 팔을 크게 하늘로 펼쳤다가 가슴에 모으기를 한동안 계속했다. 하늘과 땅과 숲속 모든 생명들의 기운을 함께 모으기 위해서다. 마침내 가슴이 맑은 기운으로 가득해진 느낌이 들고 머릿속은 투명한 면경처럼 개운해지자 은은한 바람에 묻어 들려오는 나무와 풀과 여러 생명의 소리가 선명했다. 치원은 마음 속 간절하고 선한 기운만 모두 모은 정성으로 입술을 뗐다.
“관림 숲속의 모든 뱀이며 해충은 나의 소리를 들으라. 나의 어머니와 모든 백성이 너희의 모습에 놀라 마음을 떨고 숲을 두려워한다. 부디 관림에서 물러가고 다시 들지 말거라.” 낮으나 또렷하고 엄한 목소리가 숲 멀리까지 번져나가고, 치원은 두 손을 합장해 하늘과 땅과 숲을 향해 여러 차례 허리 숙여 지성을 다했다. 어머니는 아침이 되자 어제 일은 까맣게 잊은 듯 관림으로 산책을 나가셨고 이후 뱀은 물론 해충도 다시는 보지 않았다.
당나라에서 자신을 발탁하고 귀국할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었던 고병(高騈)이 도교(道敎)에 심취했고, 치원 또한 학문적으로 깊이 공부했다. 그러나 신선술이나 방술(方術)은 신뢰하지 않았다. 현세 길복을 추구하는 민간신앙과 노자와 장자의 도가(道家) 사상이 결합해 종교가 된 도교를 엄밀히 구분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관림을 두려워하고 발길을 머뭇거릴 것을 생각하니 지성을 기울이고 싶었다. 방술과 도술에 의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뭇 생명은 간절한 마음이면 서로 전해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었다.
“혹시, 태수님 아니신지요?” 돌아보니 걸망을 어깨에 걸친 사내다. “나를 아시오?” 사내는 털썩 무릎을 꿇어 절을 한다. “천령 백성이 어찌 태수님을 잊겠습니까. 날이 어둑합니다. 제가 앞장설 테니 관아로 가시지요.” 그러고 보니 묵을 곳을 정하지 않았음을 뒤늦게 생각한다. “그러지 말고 혹시 집에 빈방이 있으면 하나 내어줄 수 있겠나?” 치원의 말에 사내는 황당해한다. “관아는 적을 대비하는데도 정신이 없을 텐데 내가 찾으면 번거로움을 더하네. 하룻밤 묵고 일찍 떠날 걸세.” “집이 누추한데 어찌….” 사내는 어쩔 줄 몰라 하지만 치원은 웃는다. “고맙네, 하마터면 노숙을 할 뻔했네.”
■난리에 산삼으로 술 빚은 약초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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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양삼은 인삼이나 홍삼보다 면역력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 |
약초를 캐 생계를 꾸린다는 사내의 굴피집은 초라하지만 안해의 손이 바지런한 듯 깔끔하다. 작고 보잘 것 없어 군사의 우악스런 손길을 피한 것인가,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치원은 서글프다.
차려내온 밥상은 보리밥 한 줌씩에 나물반찬 둘 뿐이다. 그래도 나물이 넉넉해 요기에 모자라지는 않을 양이니 부부의 부지런함일 것이다. “송구합니다. 난리 통에 닭 한 마리 남아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낮에 알았으면 위천에서 물고기라도 잡아 끓였을 텐데….” 위천은 치원이 상림 옆으로 물길을 돌려 낸 하천이다. “배불릴 수 있으니 괜찮네. 그래, 난리에 사는 건 다들 어떤가?” “지키려는 군사가 모이면 먹여야 하니 독을 긁어내고, 저쪽 군사가 들어오면 남은 독을 털어가니 양곡은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근동의 나라 곳간도 진작 빈듯하니…. 하지만 천령은 태수님 덕분에 굶어죽을 일이 없습니다. 사방 산에 나물이 풍성한 데다 누구도 넓고 긴 위천을 털어가지는 못하니 물고기는 남아 있으니까요. 모두들 태수님께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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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석식 소주가 아니라 발효액으로 담은 산양삼주. 하루 한 잔이 보약이다 |
위천을 털어가지 못한다는 말에 무영은 슬며시 웃음을 짓는다. 해운포 사람들도 바다 덕분에 비린 맛은 떨어지지 않아 기운을 잃지 않으니 말이다.
사내의 안해가 작은 잔 두 개를 나무쟁반에 받쳐와 내려놓는다. “목이라도 축이십시오.” 술 향기에 치원은 염치없지만 반갑다. “이 와중에 술이 있었는가?” “곡주는 아니고 산삼술입니다.” 산삼주라니! 치원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산삼으로 술을 담는가. 어떻게? 아니, 이 귀한 걸로 어찌?” “난리 때문에 제값에 팔 곳이 없기에 맑은 지리산 계곡물에 누룩을 발효시켜 산삼을 숙성시켰더니 제법 맛이 납니다. 안정되어 피란 간 부자들이 돌아오면 팔아볼 요량입니다.” 한 모금 삼킨 치원은 손으로 방바닥을 친다. “좋네, 좋아! 산삼향이네.” 무영이 제 잔을 치원의 앞으로 밀어놓자 사내가 나선다. “열이 많은 술이니 주무시기 전 한 잔이 좋을 것입니다.” “암, 무영이 너도 한 잔 하거라.”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