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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25> 완포향 갯바위에 쓴 ‘청룡대’

“화랑도 완성시켜야 신라가 부흥” 깨달음 얻고 해인사로 떠날 채비

  • 김정현 객원논설위원
  •  |   입력 : 2020-07-19 19:10:25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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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산강서 희망의 청룡 낚은 치원
- 풍파에도 대국 인정받는 당 보며
- 문화가 중요한 요소임을 깨달아
- 신라 근본 다시 세우기로 결심

- 진성왕 죽음 알고도 장례식 못가
- 홍익인간·풍류도 정신 되새겨
- 신하로서 마지막 도리 다하기로

- 합포만 떠나 가야산 가려하니
- 왕경 아찬직 거두라는 파발 도착

   
최치원이 ‘월영대’ 글을 남긴 합포만(마산만) 만월은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환상적이다. 치원은 그 달그림자에 의지해 서글픔을 달래며 나라의 새로운 부흥을 생각했다. 이원준 프리랜서 windstorm@kookje.co.kr
■대국이란 문화의 빛이 만든 이름

치원이 완포향(현 진해) 해안 바위에 쓴 ‘靑龍臺(청룡대)’ 글자의 각석된 것을 보고 싶다고 하니 서생은 섣달(음력 12월) 맹추위에도 배를 띄운다. 그 사이 석공은 힘찬 초서체 글자를 바위에 깊고 또렷하게 새겨두었다. 서생은 흡족해 하는 치원을 추위도 녹이고 요기를 할 요량으로 포구 주막으로 안내한다. 몸도 채 녹지 않았는데 차가운 술잔부터 비우는 치원의 낯빛이 밝다.

“용을 낚았다는 게 무슨 뜻이었습니까?” 서생의 물음에 치원은 답한다. “얼마 전부터 당이 왜 대국(大國)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네. 땅이 크고 백성의 수가 많으니 대국이기는 하지. 그런데 서국(西國)은 우리와 달리 여러 번 나라가 갈라지고 왕조가 바뀌었지. 그 와중에 치열한 내·외란을 겪고 여러 개로 나뉘어 그야말로 작은 나라가 되기도 했지만 기이하게도 대국이라는 인식은 달라지지 않았었네. 작금의 사정을 보면 또 갈라지는 환란이 번연하지만 변방의 나라들은 여전히 자신들 나라의 일로 표를 올리고 사은의 예를 갖추고 말일세. 나 또한 그런 사은표를 쓰며 비로소 ‘어째서?’라는 의문을 품고 보니 일상의 작은 것에서부터 나라의 제도까지 많은 걸 저들을 따르기 때문이었네. 그걸 문화라고 하지. 생각해보면 사실 한문(漢文)도 그 시초는 우리와 연이 깊은 동이(東夷)의 상(商)나라였지만 제대로 잇지 않으니 저들의 문자가 된 것이니 내 안의 것을 찾아 다듬는 것이 시급하구나, 깨우쳤네. 황산강이 무엇인가?” 뜬금없는 물음이다. “신…라의… 강이… 아닌지요?” 어리둥절한 서생의 더듬거리는 답변에 치원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거기서 낚았으니 우리의 용이지, 하하!” 서생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주모가 장정 팔뚝만 한 대구(大口)가 담긴 접시를 들고 온다.

“찬바람에 며칠 말린 대구찜입니다. 이 놈은 겨울이 제철이니 그저 탕으로 먹기 십상인데 완포에서는 귀한 분에게 찜으로 대접합니다.” “어떻게 만든 것이오?” “대구를 구덕하게 말려 손질하고 그 내장을 모두 꺼내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 뒤 다시 넣어 살점이 흐트러지지 않게 깨끗한 짚으로 싸 찝니다. 손이 많이 가기는 하지만 찰진 살맛이 그만이지요.”

젓가락으로 한 점 집어 맛을 본 치원이 환하게 웃는다. “여기도 신라가 있네! 같은 생선이라도 오직 신라에만 있는 맛 아닌가. 이처럼 남과 다른 우리만의 것이 우리의 문화일세. 나는 황산강에 잠들어 있던 화랑이라는 우리의 용을 낚은 것이고, 이제 그걸로 나라의 새로운 근본을 빚을 것이네.”

■진성왕의 죽음에 치원 혼절하다

   
청룡대 전경. 낚시를 하던 치원이 ‘청룡대’라 이름을 남긴 것은 큰 용을 낚아서 이리라.
별서로 가는 길목에서 무영이 초조한 기색으로 기다리다 달려온다. 치원이 밝은 낯빛을 거두며 멈춰 서자 잠시 머뭇거리다 입술을 뗀다. “선왕께서 북궁에서 붕(崩)하셨습니다. 황산(黃山)에 장사지내고 시호는 진성(眞聖)으로 한다 합니다.” 청천벽력의 소리에 치원은 그대로 혼절한다. 재위 11년 12월(음력) 을사(乙巳)일의 일이니 서기로는 898년이다.

깨어난 치원이 장례에 가려하자 모두가 말린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의안태수도 나선다. “왕경에는 선생을 경원하는 사람들이 가득한데 장례에 참석하신들 무얼 할 것입니까. 부처에게 명복을 비는 일이라면 어디에서 한들 다르지 않을 테니 자중하십시오.”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대왕께서 이처럼 외롭고 허망하게 떠나셨지만 신라의 왕으로서 정토(淨土)에서도 신라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대왕의 염원을 위해, 그의 신하로서 더욱 해야 한다.

나라의 크고 작음은 영토의 크기와 백성의 수로 가를 수 있지만 강하고 약함은 반드시 그에 의하지 않는다. 큰 나라도 사상이 가볍고 문화가 경박하며 백성이 단합하지 못하면 내부에 균열이 생겨 외침에 필경은 멸해진다. 그러나 나라가 작아도 문화가 빛나고 백성이 한마음으로 돌과 같으면 이웃은 마음으로 존경하며 감히 넘보지 못할 뿐더러 외침이 있더라도 힘을 보태 막아내니 영원히 살게 된다.

문화는 나라의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역사의 경험과 사람의 현명한 지혜로 빚는다. 신라가 아우른 삼한(三韓)의 족(族)은 국조(國祖) 단군의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건국이념을 골수에 새겼으니 어떤 족보다 바른 정신이다. 화랑도는 그 정신과 천년 역사의 지혜의 결실이며 마침내 삼한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한 근본이다. 이제 나라가 다시 혼란에 빠진 것은 홍익인간과 화랑도의 정신을 망각한 때문이다. 백성이 불가에 깊이 의지하는 것은 ‘차이는 있으나 차별은 옳지 않다’는 평등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마음이다. 청룡대에서 신라의 용을 낚았으니 이제 그 용의 승천은 백성을 하나로 모으고 나라의 구심이 되는 풍류도의 완성이리라.

■무영이 치원을 호위하는 까닭은

   
옛 완포향인 진해 용원에는 가덕 대구를 전통 방식으로 찜요리를 하는 집이 더러 있지만 맥이 끊어지려 하고 있다.
치원은 가야산 해인사를 떠올린다. 그곳에는 형님 현준이 승려로 있고 정현 스님과의 인연도 깊다. 거처를 마련하고 그들과 더불어 지혜를 모으면 풍류도 완성에도 허술함이 없으리라. 가솔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좀 더 세상을 살펴보자 마음을 정한 치원은 무영을 불러 이거(移居)를 부탁한다.

짐을 꾸리는 사이 뜻밖에 무영의 부친인 해운포의 만호가 찾아온다. 워낙 우직하여 기색의 변화를 읽을 수 없는 이인데 염려와 긴장의 빛이 확연하다. “이거를 준비하신다니 마음이 놓입니다. 함께 가십니까?” 치원이 길을 달리 할 것이라 말하자 만호는 무영을 불러 “이거는 내가 앞장설 테니 너는 선생을 호위하거라” 말한다. “필요치 않소, 과한 염려요.” 치원의 거절에 만호는 어이없다는 낯빛이다. “그럼 궁예와 견훤, 어느 쪽 편이라도 들기로 하신 겁니까?” 이번에는 치원이 기 막힌다. “지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군사보다 더 절실한 것은 요동치는 백성의 마음을 잡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선생을 모신다면 천군만마의 기세로 활용하려 할 텐데 그때는 어쩌겠습니까?” 아뿔싸! 치원은 비로소 자신의 안일함을 깨우쳤다.

   
준비를 마치고 길을 나서려 하고 보니 보름이다. 언제 다시 합포만의 달그림자를 볼 수 있을까. 기약할 수 없는 바다. 작별 인사를 겸하여 그간 가르침을 받아온 서생들이 마련한 술자리에서 달빛을 기다리고 있는데 의안태수가 찾아온다. 이제 떠나는 것이니 술 몇 잔이야 무방하리라 여겨 잔을 건네는데 태수는 난감한 기색이다.

“내일이면 떠날 사람인데 누가 태수를 탓하겠소.” 머뭇거리던 태수가 어렵게 입술을 뗀다. “그것이 아니라, 왕경에서 아찬 직을 거둔다는 파발이 왔습니다.” 모두가 그러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차마 한숨을 감추지 못하는데 치원은 태연하게 웃는다. “고맙게도 사직을 허락해주니 이제 마음 편히 유람을 할 수 있겠소이다, 하하.” 졸렬한 권력은 그렇게 시대의 비루함을 더하는 중이다.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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