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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람 실험카메라 <8> 우산없이 비 맞고 서 있을 때

이 비 다 맞고 어쩌려고…가는 데까지 씌워줄게요

낯선 우산 아래서 뭉클해진 순간

  • 김자경 이석교 기자
  •  |   입력 : 2020-02-18 19:45:45
  •  |   본지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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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은 겨울치고 꽤 많은 비가 왔다. 급하게 내리느라 지하철에 두고 온 우산이 더욱 간절하게 생각났다. 바로 앞 편의점이 있었지만 더는 우산을 사고 싶지 않았다. 집에 가면 이럴 때 샀던 우산이 십 수개는 될 것이다. 지하철 출구에서 우산을 함께 써 줄 시민을 기다렸다. 바람이 불자 비가 날려 처마 밑까지 들어왔다. 손에 든 책은 물을 먹어 더 무거워졌다. 뛰어가려고 시도했지만 너무 먼 거리라 처마 밑으로 되돌아왔다.
   
■“이 비를 맞고 가게 할 수 없다”

도시철도 1호선 부산교대역 3번 출구에서 20분째. 기자가 말을 걸기 전 먼저 우산을 내 밀어준 사람은 없었다. 한 50대 여성이 “어디까지 가세요”라고 먼저 물어왔지만 행선지가 달라 사과의 말을 하고는 자기 길을 갔다. 기자의 머리는 젖어 점점 더 엉망이 돼 갔고, 야속한 빗물은 신발을 뚫고 양말까지 침투해왔다. 낮 12시가 되자 점심 식사하러 나오는 직장인이 많이 보였다.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은 것도 잠시 이들은 말을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바빠보였다.

   
비 맞은 생쥐 꼴이 됐지만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자 ‘혹시 누구를 기다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우산 씌워드릴까요”라고 묻는 목소리가 들렀다. 기자는 “부산교대 방향인데 같이 써도 될까요”하고 되묻자 직장인 장진혁(30) 씨가 웃으며 우산 한 쪽을 비워줬다. 교대 정문까지 약 200m를 걸었다. 장 씨에게 “서문이 최종 목적지인데 우산을 더 씌워줄 수 있냐”고 물었다. 약 300m를 더 가야 하는 거리다. 장 씨는 흔쾌히 승락했다.

자신감을 얻은 기자는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두 번째로 우산을 씌워준 김정미(여·54) 씨는 행선지를 묻더니 “내 목적지가 더 가깝다. 내가 먼저 갈테니 이 우산을 쓰고 갖다 주면 된다”고 말했다. 취재 사실을 밝힌 기자가 “만약 안 갖다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김 씨는 “그럼 어쩔 수 없는거다. 그냥 우산 하나 준 셈 쳐야지”라고 웃었다.

다음 도움은 조금 뜻밖이었다. 기자가 한 60대 여성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가 “제가 약속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미안하다”라고 거절한 순간이었다. 이를 들은 이도현(39) 씨가 다가와 “도와드릴까요”라고 물었던 것. 오른쪽에는 큰 가방을, 왼쪽에는 종이가방에 우산까지 챙겨든 이 씨는 경기도에서 본가 부산에 내려왔다고 했다. 이 씨는 부산교대 정문에서 약 400m 더 가야 하는 법조타운까지 동행을 요구했는데도 흔쾌히 수락했다. 이 씨는 취재진에게 “우산없이 당황하는 사람을 한 번씩 볼 때가 있는데 쉽게 먼저 호의를 베풀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냥 호의로 하는 건데 혹시 그 목적을 오해해 변질될 가능성이 있어서다”라며 “이번에는 기자님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얘기를 들어서 도움을 주기 쉬웠다”고 말했다.

김선희(여·44) 씨도 “교대 가세요? 우산 같이 쓸래요”라고 말하며 도움을 줬다.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이라던 김 씨는 기자 쪽으로 우산을 씌워주는 바람에 자신이 비에 다 맞았다. 얼어붙었던 몸은 김 씨의 언니처럼 포근한 말투와 사람 좋은 미소로 녹아내렸다. 부산교대 정문을 넘어 400m정도 거리의 법조타운까지 함께 우산을 씌워주던 김 씨에게 취재 사실을 밝히고 이유를 물었다. 그는 “이 비를 맞고 그냥 가게 할 수 없지 않나. 아이가 나올 시간이 조금 더 있어서 모셔다 드리려고 했다”고 쑥스러워 했다.

■“나도 이웃 할머니 덕에 살았어”

이날 오후 취재진은 촬영 장소를 도시철도 1호선 부산교대역 3번 출구에서 1번 출구로 변경했다. 조금 더 다양한 상황을 관찰하기 위해 연기하는 배우도 이석교 기자로 바꿨다. 이때도 기자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도움을 먼저 요청하자 4명 중 3명이 도움을 줬다. 가장 먼저 우산을 씌워준 시민은 50대 남성이었다. “제가 우산이 없어서 그런데 같이 쓸 수 있을까요”하고 묻자 그는 흔쾌히 우산 한 쪽을 비워줬다. 식사를 하러 가는 길이었던 그는 약 50m 우산을 씌워준 후 식당으로 사라졌다. 급히 가버려서 인터뷰를 요청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두 번째 시도는 실패였지만 기분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30대 여성에게 우산을 함께 쓸 수 없느냐고 물었지만 방향이 달라 어려울 것 같다고 거절했다. 그는 오히려 “미안하다”라며 기자에게 계속 사과했다. 뒤이어 40대 여성에게 부탁하니 우산을 씌워줬다. 100m가량을 간 후 “이쯤에서 뛰어가겠다”고 하자 그는 “거의 다 왔으니 목적지까지 가자”며 함께 길을 가주었다.

도움을 준 모든 시민이 모두 감사하지만, 개인적으로 특히나 따스함을 느낀 사람이 마지막으로 도움을 주었던 정순영(60) 씨다.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행선지를 물었던 정 씨는 “예전에는 이렇게 많이 씌워줬는데, 요즘은 나쁜 사람으로 볼까봐 쉽게 권하지도 못한다”라고 말했다. 일부러 정 씨의 행선지와 다른 방향을 말했는데 “거기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마지막까지 함께 길을 가줬다.

실험 카메라라고 밝히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정 씨는 “요즘 우리 사회에 정이 메말라가는 게 너무 안타깝다.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과도 엘리베이터에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게 전부다. 예전에는 옆집 숟가락이 몇 갠지도 다 알았는데, 지금은 그런 거 물어보기 너무 어렵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나도 어렸을 때 물 웅덩이에 빠졌는데 옆집 할머니 도움으로 살았다. 그 할머니 아니었으면 그 때 죽었을 것”이라며 “그런 정이 있었는데 요즘은 너무 삭막해서 조금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정 씨는 “정이 많아야 살맛나는 사회입니다. 돈 많고 시설이 좋아졌다고 좋은 사회는 아니잖아요. 돈이 전부는 아니잖아요”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초등학교 시절 방과 후 갑작스레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던 날. 비도 그치지 않고, 기다리던 부모님도 오지 않아 풀이 죽었던 그날의 기자. 그런 기자에게 ‘함께 쓰고 가자’며 자신의 우산을 내밀었던 친구 어머니. 나눠 썼던 우산에서 느꼈던 이웃의 포근함. 이날 ‘부산사람 실험 카메라’는 기자에게 그때의 따스함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부산 아직 따뜻한 도시다.

김자경 이석교 기자

※ 제작지원 B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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