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의 종말이 눈앞으로 다가오던 197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불안에 떨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국무부가 남긴 기밀문서에는 박 전 대통령의 시각과 판단을 유추해볼 만한 단편적 기록이 다수 남겨져 있다. 경남대 지주형(사회학과) 교수의 논문 ‘미국 정부 기밀문서를 통해 본 부마항쟁’에 따르면 부마민주항쟁은 박 전 대통령에게 정신적 충격을 줬다.
CIA가 1979년 10월 26일 작성한 ‘한국인의 요구와 경제 불만 해결을 위한 경제부 장관의 정책 권고’를 보면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는 모든 경제 관료에게 현 경제 상황을 더 깊이 연구하고 국무총리실에 필요한 정책 변화를 제안하라고 지시했다. 가장 먼저 주문한 것이 과세제도의 변경 가능성, 특히 부가가치세의 개편이었다.
부가가치세는 세수 증대를 목적으로 1977년 처음 도입됐다. 상품 가격 상승 요인으로 작용한 부가가치세는 영세 시민의 큰 불만을 샀다. 특히 소상인이 많았던 부산에서 더욱 그랬다. CIA는 “대중은 노동자와 기업 중역 사이의 거대한 소득 차를 인식할 뿐 아니라 부자가 불공정한 세금 혜택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설명과 함께 “저소득층에 대한 대출을 막는 높은 은행 이자율도 문제가 되고 있다”고 기술했다. 박 전 대통령 또한 경제기획원에 이 문제를 연구하고 가능한 한 빨리 대응하라고 명령했다.
CIA의 ‘학생 상황의 기류’ 문서에는 정책적 유화와 반대로 시위 진압에는 더욱 집중했던 이유로 추정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문서를 보면 1979년 10월 25일 연세대 캠퍼스에 약 3000부의 유인물이 뿌려졌다. “17일부터 19일 부산에서 10만 명의 사람이 참여한 시위가 발생했고, 마산에서 뒤따라 시위가 발생했다. 나라의 경제 문제가 심각하고 정부는 이를 다룰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10월 29일과 30일 도서관에 모여 학생의 결의를 보여주자며 결집을 제안하기도 했다. 10월 22일부터는 한 주 동안 연세대와 이화여대 학생이 만나 반정부 시위 대책을 논의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경기산업대에서 수거된 유인물에는 ‘박 전 대통령을 죽이자’는 표현까지 등장했다고 CIA는 기록했다. 또 다른 문서에는 10월 18일 대구 청주 진주 등지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고 쓰여 있다. 10월 20일 이후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는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 여파는 전국으로 퍼졌고, 각지에서 추가 항쟁이 준비 중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박 전 대통령은 어떻게 시국을 수습할지를 놓고 큰 혼란을 겪었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미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보고에서 “박 대통령 자신도 그의 강경책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였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지 교수는 “부마항쟁은 유신정권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여파는 전국으로 퍼졌고 결국 10·26사건으로 이어졌다”며 “항쟁의 의미를 부산과 마산이라는 지역적 한계에 가둬선 안 된다”고 말했다.
신심범 기자
◇ 1970년대 전국 국세 징수 현황 (단위: 백만 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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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
1977년 |
1978년 |
1979년 |
총계 |
1,370,532 |
1,675,180 |
2,252,546 |
3,307,510 |
직접세 |
809,485 |
984,334 |
842,036 |
1,124,965 |
부가가치세 |
- |
241,573 |
835,175 |
1,088,676 |
※자료 :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1980) 한국통계연감 제2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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