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주역들 진상규명 힘모아야
40년 전, 1979년 10월 16일 ‘우리’는 거리에 있었다. 부산대 학생 200여 명의 시위는 5만 명이 운집한 ‘항쟁’으로 번졌다. 거리는 각계각층 ‘우리’로 메워졌다. ‘우리’의 입에서 “유신 철폐” “독재 타도” 구호가 터져 나왔다. 열기는 다음 날과 이튿날에도 계속됐다. 그리고 마산으로 이어졌다. 바로 부마민주항쟁이다.
부산과 마산에서 연행된 1563명의 ‘우리’는 곤봉에 머리가 깨지고, 군홧발에 짓밟혔다. 40년이 지난 지금 부마항쟁은 용공 사건이 아니라 대한민국 4대 민주화운동으로 평가받는다. 부마를 탄압하던 국가는 이제 부마가 일어난 날을 기념일로 제정해 그 정신을 기리려 한다.
그러나 부마항쟁의 진짜 모습은 여전히 감춰졌다. 40년 전 그날을 증언할 ‘우리’ 목소리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왜일까. “자랑스러운 기억이 아니라서 잊고 지내려 했다.” “빨갱이 소리 들을까 봐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웠다.” 국제신문이 만난 그날의 ‘우리’가 전한 침묵의 이유다. 레드콤플렉스로 물든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과거는 오랫동안 그날의 진실에 재갈을 물렸다.
지난해 국제신문은 기획 시리즈 ‘다시 쓰는 부마항쟁 보고서’를 통해 항쟁일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자는 ‘우리’의 염원을 보여줬다. 이번에는 40년 전 그날 거리에 있었지만, 지금은 모습을 감춘 ‘우리’를 찾아 나선다. 시대에 눌려 차마 말하지 못한 그날의 진실을 국제신문(mets@kookje.co.kr, 051-500-5121)에 들려주기를 바란다. 신심범 기자
◇ 1979년 10월, 항쟁의 현장에 있었던 ‘이 사람’을 찾습니다 |
최홍일 |
칠성음료 직원. 18일 오후 8시 부산시청 앞에서 공수부대에 맞아 머리가 찢어져 광산병원에서 치료 |
김영배 |
택시기사. 16일 오후 8시 광복동에서 차를 세워두고 시위를 보던 중 진압 경찰관과 부딪혀 넘어짐. 경찰에 항의하자 시위 참여자로 몰려 구류 |
이대수 |
선원. 17일 오후 6시 충무동에서 술을 마신 채 시위를 보다가 연행 |
홍성관 |
한국일보 광고부 사원. 부산으로 출장 와 16일 오후 2시30분 시위 가담. 17일 밤 11시50분 부평동 제일식당에서 시위 가담을 선동하던 중 연행 |
최금구 |
회사원. 17일 새벽 1시10분 시위대 뒤를 따라다니다 통행금지 위반으로 붙잡혀 구류 |
김석만 |
다방 주방장. 20일 오후 8시50분 부산진세무서에서 이유 없이 계엄군에 맞자 화가 나 동국빌딩 5층에서 음료수 공병 3개 길바닥으로 던짐. 계엄군이 건물 난입해 시민 24명을 지하실로 몰아넣자 자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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