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다대진을 지키다가 순절한 다대첨사 윤흥신(?~1592) 장군과 군민의 사적은 임란이 끝난 뒤 한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1757년(영조 33) 동래부사로 부임한 조엄은 충렬사를 참배하던 중 의아한 대목을 발견한다. 임란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 외에 이름 모를 의녀들은 물론이고 부산진 첨사 정발의 위패는 있는데, 윤흥신의 위패는 보이지 않았다. 조엄은 통신사로 일본에 갈 때 대마도에서 눈여겨봤던 고구마를 우리 땅에 처음 들여온 ‘조내기 고구마’의 주인공이다. 조엄은 윤흥신의 사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동래부에서 100리나 떨어진 다대진을 직접 찾기도 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윤흥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던 까닭에 안타까웠던 조엄은 경상도 관찰사가 돼 동래부를 떠난 뒤에도 이를 잊지 않았다. 조엄은 1761년(영조 37) 경상도 내 효자와 열녀, 충절이 뛰어난 이들을 포상할 것을 조정에 청했고, 윤흥신의 배향도 함께 거론했다. 마침내 조엄의 노력은 결실을 본다. 윤흥신의 위패는 1772년(영조 48) 충렬사에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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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때 순절한 다대첨사 윤흥신과 아우 윤흥제, 군민의 충절을 기리는 윤공단. |
가문 대대로 부와 권력을 누렸던 파평 윤씨. 이 집안에서 태어난 윤흥신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그의 아버지 윤임은 연산군을 왕좌에서 쫓아낸 중종반정에 앞장섰으며, 외척으로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중종 때 장경왕후가 윤흥신의 고모다. 하지만 명종 때 을사사화로 윤흥신의 아버지와 형들이 죽임을 당하고 재산은 몰수됐다. 윤흥신과 남동생 윤흥제는 나이가 어려 목숨을 구할 수 있었으나, 30년 넘게 관노로 살아야 했다.
윤흥신 형제는 선조 즉위 직후 아버지 윤임의 신원복권에 따라 양반 신분을 되찾게 된다. 공신의 후손이란 점 등에 힘입어 윤흥신은 무과별시로 벼슬길에 나섰고 1582년(선조 15) 진천현감에 부임했지만, 문자를 해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했다. 이후 선조가 당시 우의정 류성룡의 천거로 윤흥신을 다대첨사로 임명한다. 관직에 복귀한 시점은 임란 발발 얼마 전이었다. 참으로 기구한 삶이다.
오광수 기자 inmi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