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7일 이후 제주 4·3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4·3사건의 생존 수형인 18명이 2년 여간의 법정 다툼 끝에 ‘공소기각’ 판결을 얻어냈다.
이들 생존 수형인은 1948~1949년에 내란죄 또는 국방경비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년에서 최대 20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무죄를 받은 이유는 명확했다. 생존 수형인들이 정당한 판결에 의해 수감됐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공소장과 공판 기록·판결문 등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정치권도 4·3사건의 재해석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4월 3일 문재인 대통령은 4·3사건 70주년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12년 만에 대통령이 참석했다. 문 대통령은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린다.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없이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추념식이 참석한 유족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국제신문은 4·3사건 초반 국방경비대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근무했던 김익렬 중령(중장 예편·1988년 사망)의 기고문을 재조명한다. 김 중령은 1948년 8월 6~8일 국제신문(당시 산업신문) 기고를 통해 반란군 지휘자(인민군사령관·김 중령의 표현을 차용) 김달삼과의 회견 과정을 기록했다. 치안 책임자와 반란군 수뇌부의 ‘정상회담’은 평화적인 분위기로 진행됐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는 김 중령의 회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반란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4·3사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민간인 학살이 광범위하게 자행된다.
김 중령의 기고문 1편은 양측의 회담이 진행되기 전까지의 과정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회담을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국방경비대와 반란군의 모습이 상세히 그려졌다. 이후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반란군을 만나러 떠나는 김 중령의 결기어린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기고문은 원문을 그대로 수록하되, 맞춤법과 표기법은 현행에 맞추었다. 일부 한자는 한글로 고쳤다. 김준용 기자
남해의 고도···제주도는 우리에게 가슴 아픈 쓰라린 기억을 남겨주었다. 어찌하여 우리는 싸워야 하였으며 또 싸우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을 것이냐?
성봉 한라산만이 이 동족간의 처참한 ‘피의 기록’을 아는 듯 말없이 서 있고 파도치는 백사장에는 무심한 갈매기떼 만이 동방 약소민족의 비극을 아는 듯 처량히 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하고싶지 않은 싸움에서 너무도 많은 것을 배웠다. 이 몸소 체험한 쓰라린 교훈은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평화와 독립을 찾기 위하여 통일과 단결과 그리고 아름다운 동족애로써 이 아슬아슬한 위기를 헤엄쳐 나가지 못하는 까닭에 이번 제주도사건을 철저히 분석하여 해명하지 않을 수 없다. 수평선 저쪽에 본토를 바라보며 전통과 근면 속에서 살아온 평화의 섬나라···제주도에도 해방이 가져은 모진 바람이 불었으나 그것이 곧 '산사람'과 군경의 무력충돌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동안 당국도 각종의 보도기관도 이 사건을 상세히 보도는 하였으나 아직까지도 소위 ‘산사람’이라고 부르는 반란군의 정체며 그들을 지도하는 수령에 대하여는 하등의 보도와 발표에 접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어떻게 조직되었으며, 무슨 방법으로 무력대항을 하였으며, 그 최고지휘자는 과연 어떤 인물일 것이냐? 다행히 본사는 당시 국방경비대 제주도 최고지휘관으로 있다 사령부 소속으로 전임한 김익렬 중령이 말하는 반란군 지휘자 김달삼과 김 중령과의 회견기를 게재함으로써 금차 사건의 편모를 소개코자 한다. 다음은 김익렬 중령의 수기의 일부이다.
무엇 때문에 유혈?
(上) 낮에는 농부 밤에는 산사람 부대
<당일의 회억>
지난 4월 3일 새벽 3시를 기하여 제주도 11개 경찰지서와 관공서, 우익정계 요인의 암살과 방화 등을 감행한 좌익계열의 폭동사건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채 동족상쟁의 피어린 참상만이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을 따름이요, 아직까지도 반란군 진두에서 총지휘를 하는 소위 인민군총사령의 정체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필자와 필자의 부관 두 사람 이외에는 누구 하나 그 정체를 확실히 알지 못하며, 전투지휘가 상당히 능하느니 뭐니 하여 사실 아닌 사실이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아듸프로’가 횡행함을 볼 제 필자는 적지 않은 불만을 느끼는 바이며, 그릇된 선전을 시정하려는 의미에서 직접 인민군사령관이라 칭하는 김달삼(金達三·23)과의 2시간 여의 회담기를 발표하여 사회 여러분들의 정당한 판단에 맡기려는 바이다.
<발단은 경찰에서 산(山)사람이 되기까지>
사건의 발단은 소위 4·28파업사건과 3·1기념행사 관계로 제주도내에서 약 2500명의 청년이 경찰에 구금되었고, 이 구금으로 3명의 고문치사자가 생기고 3월 15일 치사자 이 모라는 청년의 시체를 투강하려다가 그 가족들에게 발견된 것이 극도로 민심에 큰 충격을 준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민심은 차차 극도로 악화하여 3월 28일 애월리 산간부락에서 200여 명의 도민이 무장하고 전투훈련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경비대측에서는 4월 2일 당시 제주도 경찰청 김영배 청장과 군경협조하여 모종사건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협의를 굳게 하고 필자는 한림에서 숙박하고 있는 동안 그 이튿날 새벽에 제주도 일대에 이 사건이 발생된 것이다. 그러나 경비대로서는 상부의 명령이 없음으로 아무런 행동을 개시하지 못한 채 만반의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을 뿐이고, 낮에는 농부고 밤에는 반란군에 가담하는 일이 많은 소위 ‘산사람’의 정체를 분별하기 어려운 도외에서 온 경찰대의 무차별 사살은 상호간 너무나 엄청난 살생이 생겼을 뿐더러 무력으로써는 도저히 동 사건의 원만한 해결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태는 거익혼란 쌍방 회합제의>
관계에서는 제주도 유지와 관공서원이 주동이 되어 시국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민족청년단이 주동이 되어 시국수습특사대를 조직하고 반란군측과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동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이 좋은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었다. 경비대에서 본격적인 전투를 개시한 것은 4월 20일 증원부대가 제주도에 오고서부터이다. 그러나 경비대의 근본 방침은 사살보다 4월 24일 상오6시에 “평화회담에는 응할 용의가 있으나 신분보장한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 작년 서울에서도 신분보장 운운하고 체포한 사실이 있는데 믿을 수 없다”고 삐라로써 회답이 왔다. 4월 25일 “절대 신분보장한다”는 고문을 또 뿌렸다. 4월 26일 또 삐라가 전달되었다. “경비대의 신사성을 믿는다. 29 일 12시 경에 회견하되 장소는 추후 통지 하겠다”고 회답이 왔다. 이 삐라를 받은 경비대에서는 즉시 참모회의를 개최하고 이 회담 진행에 관한 사항을 토의하였으나, 5·1 메-데(메이데이·노동절)를 앞둔 4월 말이니 만치 방금까지의 전투행동을 중지하고 29일까지 기다리는 것은 반란군측의 세력을 만회시키고 5·1 메-데의 모종 행사에 큰 힘을 주는 것이 된다고 하여 29일까지는 기다릴 수 없다는 결의를 보게 되어 27, 28, 29 3일간은 맹렬한 전투를 개시하였는데, 이 전투는 제주도 소탕전 중 제일 격렬한 전투였고, 이 전투로 반란군의 보급선의 일부를 단절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반란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이러한 전세로 10여 일 내외에는 완전히 반란군을 선무할 수 있을 만큼 되었던 것이다. 29일 상오 12시에 정보부에는 광목잠뱅이에 밀짚모자를 쓴 34, 5세의 중년 농부가 반란군의 연락으로 경비대를 찾아왔다. 얼굴 빛은 비록 검다고 하나 넓은 이마와 광채나는 눈은 심상치 않을 뿐만 아니라 완전무장한 경비대의 보초선을 유유히 활보하는 모양은 비록 반란군이기는 하나 남아의 호연지기가 있음을 칭찬할 만 하였다.
<단기로 처굴에 생사난측의 행정>
그는 간단한 인사가 있은 후 30일 상오12시에 안덕면 산간부락에서 회견할 것을 제기하고 공격의 심하였음을 말하는 한편 무조건하고 항복한다는 말까지 전하고는 회견하는데는 쌍방 모두 3인 이하로 하되 경비대 측에서는 총지휘관인 연대장과 그 밖에 두 사람으로 하고 무장은 서로 사양하자고 말하였다. 나는 이러한 조건을 무조건하고 수락하였다. 그것은 어떠한 일이 있든지 간에 만나고야 평화적인 해결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연락원이 돌아간 후 경비대에서는 즉시 참모회의를 개최하고 이러한 정도의 요구조건에 대한 우리들의 응수조건을 토의하고 그날 밤 나는 나의 집에 나가서 잤다. 아니 잔다는 것보다는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무차별하고 사살하는 반란군측의 진중에 들어가야만 할 나의 신변을 생각할 제 이 마지막 길을 가는 사형수의 가슴 쓰린 마음을 생각하여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군인이라는 적지 않은 자부심은 이러한 큰 문제를 앞에 놓고 나에게 큰 편달에 힘을 주는 것이다. 만일 다시 돌아오지 못할 일이 생긴다면은 하고 나의 주위에 있는 여러 가지 것을 정리하고 밤이 늦게 유서를 두 통 써놓았다. 한 통은 가족에게 주는, 한 통은 제갈량이 추풍 오장원에서 강유에게 주든 것과 같은 후군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아내가 병영에 들어오는 것까지 거부하였다. 비밀군무관계라고···. 일이 끝난 다음 아무런 근심없이 자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머리를 만져 보기도 하였다. 이것이 마지막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이튿날 아침 나의 가족에게는 서울까지 군무로 출장 간다고 말하여 놓고 경비대에 돌아왔다. 동행할 두 장교를 제외하고 모든 장정을 모아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 중에는 나의 가는 길이 슬픔의 길이라는듯 눈물을 흘리는 장교도 몇 사람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약한 모양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평시 같은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하고 나서 두 사람의 부관 그리고 자동차 운전수 도합 네 사람은 커다란 해망과 슬픔을 가득 품고 산 상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