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의 거장’ 김열규 전 서강대 명예교수는 한국의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최민식(1928~2013·사진)에 관해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는 인간 최민식이 순례하고 돌아다닌 인간 세계가 필경 너무 잡다한 인간 비극의 무대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일상적인 인간 비극의 생생한 증언자, 최대 규모의 목격자가 되기를 스스로에게 성스럽게 짐 지운 사람이다. 그에게 카메라는 스스로 어깨에 맨 십자가 바로 그것이다’.
‘빈민의 사진가’ 최민식이 답했다. “나의 작품은 인간이 중심이다. 나는 인간을 묘사함으로써만 나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었다. 인간이 거기 있기에 나는 사진을 찍었다. 내 사진은 나를 찾아주었다. 가난과 불평등 그리고 소외의 현장을 담은 내 사진은 ‘배 부른 자의 장식적 소유물’이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아미문화학습관 2층에 마련된 ‘최민식 갤러리’에 들어서면 흑백 사진 속 선생이 관람객을 쳐다본다. “너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꾸지람하는 듯하다.
황해도 출신의 선생은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애초 화가를 꿈꿨던 그는 사진의 세계에 빠져 든다. 1960년 부산 부민동 산비탈 판잣집 풍경, 자갈치시장의 노점상 할머니, 판잣집의 창문 밖으로 상체를 내놓고 책 읽는 까까머리 어린 학생, 길게 늘어선 물동이 행렬, 동생을 등에 업은 소녀,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속에서도 해맑게 웃는 어린 학생들…. 그의 사진작품 속에서 말 없고 소외된 이들이 집중적으로 조명됐다. 그들을 보며 마음 아파했던 선생이었다. 그만큼 부산을 사랑했다. 특히 자갈치시장 사람을 작품에 많이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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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문화학습관 2층에 마련된 ‘최민식 갤러리’ 전시 공간. 박수현 선임기자 |
가난한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찍는’ 선생에 대해 ‘조국 근대화’ ‘잘살아보세’를 외치던 정권이 좋아할 리 없었다. 외국에서 극찬을 받았던 그의 작품전에 정작 선생은 정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선생은 생전에 “꾀죄죄한 나의 옷차림과 가난한 사람들의 사진을 찍는 것 때문에 간첩으로 몰리는 일이 많았다. 50년간 100번 이상 간첩신고를 당했다”고 되돌아보기도 했다. 오광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