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을이름 딴 집 ‘목압서사’로 명명
- 귀농 선배·마을 주민 7, 8명 모여
- 한시 역사 한문 공부 함께 시작해
- 지리산 답사와 논어 삼국유사 강독도
- 역사·한문 배운 덕에 재능기부인 셈

- 필자의 집내 ‘목압고서박물관’ 개관
- 소장하고 있는 희귀 자료 공개하니
- 주민부터 외국인까지 발길 입소문

- 한시백일장 후 문학박물관도 열어
- 시집·소설집·문학이론서 수천 권 비치
- ‘하동의 시인·작가전’ 열고 책 대출도

지난해 봄 경남 하동군 화개골 목압마을에 들어오자 주민들이 가끔 한자를 들고와 무슨 뜻인지 물어보곤했다. 아마 도시에서 온 사람이니 당연히 알겠지라고 생각하고 무작정 찾은 것 같았다.

	지난 6일 오후 5시 목압서사 내 ‘목압문학박물관’ 현판식을 한 후 참가 주민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마을의 김태곤(79) 어르신은 “나는 초등학교만 졸업했지만 우리 마을에서 학력이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이어 “당시는 6·25전쟁 때여서 이곳에 학교가 없었어. 가끔 선생님이 오셔서 큰 바위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공부를 가르치셨지. 그러다 쌍계사에 공간을 하나 빌려 수업을 하곤 했어. 초등학교 졸업장은 받았지만 도시 학생들처럼 정상적으로 수업한 건 얼마 안 돼.”

평생 차농사를 지은 어르신들이 어려운 한자의 뜻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주민들이 물어보는 한자의 내용을 보면 칠불사 주지를 지내다 몇 해 전 열반한 통광 스님에게 받은 한시와 총무원장을 지낸 서옹 스님의 병풍 글씨 등 다양하다.

역사와 한문을 전공한 필자는 그것이 인연이 돼 필자의 집을 마을이름을 따 ‘목압서사(木鴨書舍)’로 명명했다. 여기서 필자보다 먼저 귀농한 앞집 김동혁(60), 윗집 이기송(60) 씨, 그리고 7~8명의 주민과 함께 한시와 역사 및 한문 공부를 시작했다. 지리산 인근을 답사하기도 하고 ‘논어’ ‘삼국유사’ 등을 강독하고 옛 간찰 번역도 했다. 이를 계기로 지난 3월 ‘한시 읊기대회’를 가지기도 했다. 필자는 그분들과 함께 공부를 하면서 각자의 성향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추계(秋溪)목재(木齋)만당(萬堂)죽계(竹溪) 목와(木窩) 등의 호를 지어드려 지금까지 이름 대신 호를 서로 부르고 있다. 인근의 50대의 어머니와 20대의 아들은 한자의 기초부터 배우기를 원해 천자문부터 공부하기도 했다. 필자가 고신(古新)이라는 호를 지어준 그 아들은 이미 다른 서당에서 ‘명심보감’을 공부한 경험이 있어 진도가 빨랐다.

그 후 주민들과 인문학 공부를 하는 연장선에서 지난달 목압서사 내 ‘목압고서박물관’을 개관했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을 이용해 주민들에게 좀 더 심도 있는 역사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유럽 일본 등지에서 흔 히 볼 수 있는 마을 단위의 문화공간인 셈이다. 규모는 작지만 3개월마다 기획전을 갖기로 했다.

	지난 6일 필자의 집인 목압서사 마당에서 ‘제1회 한시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다.

개관 기념전으로 ‘점필재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을 주제로 관련 자료를 전시 중이다. 김종직 문집 등 4종 8책과 김종직의 제자인 일두 정여창, 탁영 김일손 등의 문집 등 4책, 그리고 이들의 유묵(遺墨) 1책 등을 볼 수 있다.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으로 이어지는 도학의 흐름 차원에서 정몽주의 문집 4책도 함께 전시 중이다.

이들을 주제로 잡은 이유는 모두 지리산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스승인 김종직이 지리산을 둘러본 후 유람기인 ‘유두류록’를 짓자 제자인 정여창과 김일손도 스승의 뒤를 이어 14박15일간 지리산 탐방한 후 역시 유람기를 지었다. 이들은 지리산 유람을 마치고 모두 화개로 내려왔다. 정여창의 유집 중 유일한 한시인 ‘악양’에 보면 ‘4월 화개에는 보리가 익었네’라는 시구가 있어 이들 모두 화개골과 관련이 있다. 특히 정여창은 화개면 덕은리의 악양정에서 공부를 한 전력이 있기도 하다.

목압고서박물관을 개관하자 인근 주민뿐 아니라 관광객들, 심지어 외국인도 방문해 고서를 들춰보며 신기해했다. 필자는 이들에게 일일이 설명을 해주고 있다. 지난 3일 대구에서 가족과 화개골을 찾았다가 목압고서박물관 얘기를 듣고 들린 박재범(53) 청구고 국어교사는 “화개골에 수차례 왔지만 이런 박물관이 있는 건 처음 알았다”며 “관련 분야 박사인 관장님의 설명을 듣고 많은 지식을 얻어 기쁘다. 화개골에 이처럼 다양한 박물관이 많으면 외국처럼 테마 관광지로도 손색이 없겠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에서 화개골에 놀러온 부부가 목압고서박물관을 둘러보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달 21일에는 이스라엘의 직업군인인 한스 부부가 찾아와 “수백 년 된 고서를 이곳에서 처음 봤다”며 “한 달간 한국을 여행하고 이제 돌아갈 즈음인데 이런 진귀한 자료를 보고 설명을 듣게 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태풍 ‘콩레이’가 상륙한 지난 6일에는 목압서사 주최로 마을 단위의 백일장인 ‘제1회 한시백일장’을 목압서사 마당에서 열었다.

비록 참가자는 5명이었지만 이들의 한시 수준은 만만찮았다. 인근 도심 마을에 거주하는 최한익(59) 씨가 ‘허심(虛心)’을 시제로 지은 오언절구가 장원을 차지했다.

‘來井琴花水(내정금화수) / 離鄕心每空(이향심매공) / 酒杯說痛思(주배세통사) / 餘命與妻風(여명여처풍)’. 풀이하자면 ‘꽃과 물 있는 정금리에 왔건만 / 고향 떠난 마음 늘 허전하네 / 술잔으로 아픈 심정 달래며 / 여생 거리낌 없이 아내와 함께 하겠네’.

이날 백일장을 마친 후 목압서사 내에 ‘목압문학박물관’을 개관했다. 개관 기획전으로 3개월간 ‘하동의 시인·작가들’을 주제로 전시하고 있다.

	필자가 한 주민의 집에서 한시창작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다.

전시 자료로는 이병주 선생의 소설집 ‘관부연락선’ ‘지리산’ ‘산하’ ‘바람과 구름과 碑’ ‘타인의 숲’, 정공채 시인의 시집 ‘정공채 시집 있습니까’ ‘사람소리’ ‘배 처음 띄운 날’, 정호승 시인의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서울의 예수’ 소설집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 1·2’, 정순영 시인의 시집 ‘침묵보다 더 낮은 목소리’, 정규화 시인의 시집 ‘농민의 아들’, 그리고 화개골에서 태어나 지금도 모암마을에서 시작 활동을 하고 있는 김필곤 시인의 시집 ‘달빛마음 달빛향기’, 범왕마을에서 역시 작품을 하고 있는 김용철 시인의 시집 ‘물고기좌 부나비’ 등이 있다. 악양면의 ‘박경리문학관’과 ‘최참판 댁’과 관련이 있는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작품집 ‘토지’를 비롯해 ‘김약국의 딸들’ ‘파시’ ‘성녀와 마녀’ 등도 전시하고 있다. 장소가 협소하지만 문학박물관에는 시집과 소설집 각 1000여 권, 시와 문학이론서 200여 권 등이 비치돼 있다. 주민들이 대출을 원할 경우 무료로 빌려준다.

문학박물관을 개관한 날 저녁 때쯤 방문한 인근 백혜마을의 서모(여·62) 씨는 “문학박물관에 오니 행복한 느낌이 든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이날 조병화 시인의 시집 ‘남남’과 자매인 김채원·김지원 작가가 각각 이상문학상을 받은 수상집을 빌려갔다. 문학관에는 이곳이 지리산 언저리인 점을 감안해 월간 ‘산’과 ‘사람과 산’ 등 산악 관련 잡지 100여 권도 있다.

필자는 목압고서박물관 개관을 기념해 매주 한 차례 ‘조해훈 박사의 인문학 특강’과 답사를 하고 있다. 그동안 ‘점필재 김종직과 지리산’ ‘화개면과 일두 정여창’ ‘초의선사와 칠불사’ ‘서산대사와 화개골’ ‘추사 김정희 가족과 화개골’ 등을 주제로 주민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특강을 했다. 화개골이 필자를 받아주었기에 이 지역에 대한 값을 해야겠다는 차원의 재능기부인 셈이다.

시인·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