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이 부산에서 발생한 대가는 혹독했다. 독재정권 아래 공권력은 무고한 시민을 매질하고 허위자백을 받아내 범죄자로 만들었다. 고등학생이라도 봐주지 않았다. 경남공고 3학년생이던 옥상열(57·사진) 씨는 길을 가다가 아무 이유 없이 경찰에 잡혀 방화범으로 조작된 뒤 최근 39년 만에 무죄를 인정받았다.
1979년 10월 17일 오후 옥 씨는 부산 중구 남포동 친구 집에서 열린 생일파티에 참석한 뒤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시내에서 시위가 있다”고 말했지만, 그게 부마항쟁인 줄은 몰랐다. 남포파출소를 지나는데 그곳이 불타고 있었다. 시위대가 불을 지른 것 같았다. 우두커니 서서 이 모습을 보고 있는데, 곤봉을 든 경찰 진압대가 발길질로 자신을 쓰러뜨렸다. 이후 경찰서로 연행됐다.
경찰은 그에게 돌연 방화 혐의를 적용하고 수갑을 채웠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며 저항했지만, 열흘이나 경찰관들에게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하면서 허위 자백 조서를 썼다. “방화를 인정하라며 인정사정없이 매질했습니다. 얼굴에 수건을 덮어 물을 들이부었습니다. 이러다가 죽을 것 같았습니다. 기진맥진해 생면부지의 황모 씨 등을 공범으로 허위 지목했습니다.”
다음 해인 1980년 옥 씨는 방화 혐의로 징역 장기 1년, 단기 6월의 형이 확정됐다. 복역 이후 그의 삶은 180도 뒤틀렸다. 범죄자로 낙인찍히면서, 고등학교에 복학할 수 없었다. 옥 씨는 “이리저리 떠돌다 1981년 2월 남들보다 2년 늦게 졸업장을 받았다. 전과자 신분에 취업도 어려웠다. 나를 받아주는 곳이 없어 원양어선을 타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고 털어놨다.
지난 7월 옥 씨는 39년 만에 방화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서울고법 형사10부는 소요 및 공용건조물 방화 혐의로 형을 확정받은 옥 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경찰이 허위 자백을 끌어내려고 고문과 가혹행위를 했다고 볼 개연성이 많다. 각종 진술을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가 없다”며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재판부는 부마항쟁이 시민 지지 아래 전개됐다며 옥 씨의 소요 혐의도 인정하지 않았다.
옥 씨는 마지막 재판에서 진술하면서 지난 39년의 삶이 하나하나 스쳐 지나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국가폭력에 삶이 송두리째 희생된 나 같은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민주주의가 자리 잡혀야 국민을 업신여기는 위정자가 또다시 집권하지 않습니다. 부마항쟁의 가치와 정신을 부산시민과 온 국민이 제대로 학습하는 토대가 마련돼야 합니다.”
김해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