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순종의 승하로
- 일본의 탄압이 한층 거세질때
- 와세다대 희곡 전공 유학생 김우진
- 조선 최초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
- 총독부의 나팔수 기자이던 우승해
- ‘이이사쿠’ 일본말로 좋은 계책이자
- 음반번호 2249인 노래가 만들어지며
- 이들의 운명은 격랑 속으로 빠져든다
<사진설명: 일본 일동축음기주식회사는 1925년 9월~1927년 말까지 180매 내외의 한국 음반을 발매했다. 음반은 B-1~B-179번 식으로 번호가 매겨졌는데, 이 번호체계를 따르지 않은 것은 ‘사의 찬미’ 음반 단 하나다. ‘사의 찬미’ 음반 번호는 ‘2249’(사진 참조). 발음하면 좋은 계책을 뜻하는 일본어 ‘이이사쿠(いいさく)’와 비슷하다. 2016년 일본 온라인 경매에 나온 ‘사의 찬미’ 유성기 초반(初盤·최초 음반)의 경우 550만엔(약 5600만 원)에 낙찰된 바 있으며, 국내에도 몇 장 없을 정도로 희귀하다. 사진 제공=한국대중음악박물관>
<프롤로그 : 순종의 승하>
1.1926. 4. 26-사건 발생 100일 전
-매일신보 사회부.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
우승해:매일신보 사회부장 우승해입니다. (놀라며) 예? 아, 아닙니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하이! (전화 끊으며) 이기자! 이남구기자!
이남구:(무대로 들어오며) 예! 부장님! 부르셨습니까?
우승해:특집 준비해! 순종이 승하하셨다는 소식이야.
이남구:예? 결국… 또, 한바탕 피바람이 불겠군요. 고종인산일에 일어난 3·1운동 때 처럼요.
우승해:안 그래도 총독부 호출이야. 비상사태지! 제목 뽑고! 순종 관련기사 빠짐 없이 찾아봐.
2.1926. 6.10-사건 발생 55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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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의 찬미’ 재킷. 사진 제공=한국대중음악박물관 |
-순종인산일. 무대 밖. 누군가 ‘대한독립만세’ 선창하면 뒤따라 함성 이어진다. 무대는 6·10만세운동 현장으로 바뀐다. 손수건 크기의 태극기를 든 학생들, 격문을 뿌리며 구호를 외친다.-
시위대원1:대한독립만세.
시위대원2:산업, 교육은 조선사람들 본위로 하라.
시위대원3:대한독립 운동자는 단결하라.
-달려오는 일본 순사들, 태극기가 휘날리고 호루라기와 칼이 난무한다.-
3.1926. 6.10~26일
-경성 밤거리.두 남자, 반대편에서 몸을 숨기듯이 조심하며 무대에 등장한다.-
조명희:우진이, 별 일 없었나.
김우진:명희! 자네는! 우리 시대일보는 어찌 되었나?
조명희:시간문제지.신문사 인쇄기를 반출해 나가 격문을 찍은 신문배달부 김낙환이 체포되었어. 위태위태해. 정보가 새 나가 5월 말부터 지금까지 경무국 고등계에 잡아들인 사람만 벌써 천 명이 넘는다고 하네. 자네는 어쩔 텐가?
김우진:바로 동경으로 떠날 걸세.독일을 거쳐 늦어도 9월 안에는 러시아에 들어가 있을거야. (가방을 들어 보이며) 자금 3000원(현재 약 3억 원)도 마련했어. 이젠 나서야지.
-일본 순사의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
조명희:그래, 우리 동경유학생 시절부터 꿈꾸지 않았나. 새로운 세상을! 나도 곧 따라 가겠네.
김우진:러시아에서 만나세!
<제1장 : 이이사쿠(いいさく· 좋은 계책)>
1. 매일신보 사회부
(소리):큰 사건이 하나 필요하므니다. 뻥! 터질 큰 건! 6·10만세운동이라니! 일본과 조선의 위대한 공영에 있어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은 쓰레기일 뿐이므니다. 사이토 총독의 정치철학은 문화정치요, 펜은 칼보다 강한 법! 무력보다 강한 민중의 가슴 깊숙한 곳을 건드릴 수 있는 것, 뭐 없겠소? 멋진 작품, 이이사쿠를 만들어 보므니다.
-똑똑똑… 우승해,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겨 있다.-
이남구:부장님, 딱 떨어지는 인물이 있습니다.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 어떻습니까?
우승해:윤심덕?! 노래로 이이사쿠를 만들자구? 뭐 좋은 아이디어 있어?
이남구:사면초가(四面楚歌) 병법이죠.
우승해:노래로 저항의지를 꺾겠다? 제법 그럴듯해. 그런데 윤심덕, 콧대가 높아 될까?
이남구:(코웃음 치며) 콧대는 무슨!이제 한 물 갔습니다. 나이 서른에, 집안은 또 뭐 하나 볼게 있습니까? 콩나물장수 아버지, 병원 허드렛일 하는 어머니에, 또 그 스캔들은요. 공부 꽤나 했다는 경성 모던걸이 그놈의 돈 때문에 하는 꼬락서니 하구는!
우승해:(웃는다) 아, 그거? 윤심덕이 돈 600원에 장안의 소문난 한량 이용문이한테 첩으로 갔다가 한 달 만에 소박 맞은 거?
이남구: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괄괄한 성격에, 가는데 마다 사고뭉칩니다. 우리 토월회도 괜히 연기도 못하는 윤심덕을 유명세에 데려 왔다가, 달랑 2주 만에 주역 배우들을 선동해 몽땅 끌고나가는 바람에 문을 닫았다는 거 아닙니까.
우승해:이기자, 토월회 전무였었지? 화 많이 났겠네.
이남구:(흥분해) 나다마다요. 그 생각만 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니까요!
우승해:인텔리 동경유학생 출신으로 돈 받고 첩으로 들어갈 정도의 여자라… 흐음, 결국 돈만 많이 부르면 끌려온다는 이야기네. 노래 잘하고. 스캔들로 유명세도 있고. 괜찮아 보여! 잘 만들면 멋진 작품이 되겠어!
2. 사진관
-윤심덕, 의자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사:이쪽으로! 그렇죠! 고개를 왼쪽으로 약간! 네, 좋습니다. 자, 찍습니다.
이남구:잠깐만요!(어둠 속에서 튀어 나온다) 윤선생, 다리를 좀 꼬아보는 건 어떻겠어요? 노랫말 가사지에 실릴 사진인데 좀 도도해 보였으면 좋겠어요!
윤심덕:(다리를 꼬며) 이렇게요?
이남구:좋습니다. (사진사 돌아보며) 이제 찍어 주시죠?
사진사:이쪽을 봐 주세요! 네, 턱을 아래로 당기고 입꼬리 살짝! 좋습니다. 하나,둘,셋!
3. 경성역.1926. 7. 16-사건발생 19일 전
-윤심덕, 윤성덕 여행 트렁크를 손에 들고 무대로 나온다. 맞은편에서 우승해, 이남구 나온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우승해:자매분이 타실 오사카행 기차표, 여기 있습니다. 부산역에선 부관연락선까지 잔도로 철도가 연결되어 있으니 바로 타실 수 있을 겁니다.
윤심덕:(경쾌하게) 그럼요. 저도 잘 알죠.
-기차 기적소리 울린다.-
윤심덕:들어가 봐야겠어요.
우승해:실력 발휘 잘하세요. 성덕 씨도 언니 노래 반주, 잘 부탁해요!
윤성덕:네!
-우승해 일행, 윤심덕과 작별한다.-
이남구:윤선생! (윤심덕, 뒤돌아본다) 부탁이 있는데, 올 때 넥타이 하나 사다 줄래요?
윤심덕:(피식, 농담처럼) 넥타이요? 죽어도 사 와요?
우승해:(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죽으려거든 넥타이를 먼저 소포로 부치고 죽으면 되잖아요!
윤심덕:하하하. 오!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4.1926. 7. 21-사건 발생 14일 전
-조명희의 집. 신문을 든 조명희, 무대 앞으로 걸어 온다.-
조명희:이 신문 광고! 이거 뭐야? ‘소생은 이번에… ’
-우승해, 인사하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우승해):‘일동축음기주식회사 조선총대리점을 인수 개설하옵고, 동사의 제품과 각국 근대의 축음기, 그리고 각종 레코드도 부속사업으로 판매케 되었습니다. 많이 사랑하시고 많이 거래하여 주시옵소서’.
조명희:조선축음기상회 주인 우승해… 우승해? 우승 좋아하시네. 신파연극 좀 하다 완전 깨지더니! 그에 비하면 (회상의 미소) 우리 동우회 연극, 참 대단했었지!
-과거 회상-
4-1. 부산. 1921. 7. 9-사건 발생 5년 전
-동우회 최초 공연의 막간무대. 김우진, 윤심덕이 걸어 나온다.-
김우진:저는 와세다대학 문학부에서 희곡을 전공하고 있는, 오늘의 연극 ‘김영일의 사’ 기획과 연출을 맡은 김우진입니다. (인사와 박수)
윤심덕:저는 우에노음악학교 학생 윤심덕입니다. 동경유학생 모임에서 만난 친구들이 여름방학 동안 뜻있는 일을 한다기에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인사와 박수)
김우진:이 공연은 동경유학생, 노동자, 고학생 3000명이 회원으로 있는 동우회의 이름으로 만든 최초의 연극무대이며, 또한 오늘 부산 공연은 전국 25개 도시를 순회하는 동우회 연극의 첫 무대이기도 합니다. 수익금 전액은 동경 동우회 회관건립과 후원기금으로 쓰일 것입니다!(환호성)
윤심덕: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은 바로 우리 조선의 미래요, 희망인 젊은이들의 꿈에 함께 동참하고 계신 위대한 분들이십니다! (박수)
김우진:우리 모두가 함께 하면 조선사회의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습니다. (환호성)
-그때, 일본순사 호루라기를 불며 무대에 뛰어 든다.-
일본순사:지금 뭐라고 했스므니까? 조선사회의 새로운 미래?
-우우우~~ 관객들의 거센 야유소리.일본순사, 위세에 눌린다.-
일본순사:조센징이노!
-일본순사, 군중들의 위세에 물러난다.-
김우진:그럼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 양의 오페라 카르멘 중 ‘하바네라’ 한 곡을 청해 듣고 다음 무대 막을 열기로 하겠습니다. (하바네라 음악 BGM. 윤심덕 노래한다)
-다시 현실-
조명희:그때 부산 첫 공연, 최고였어! 평양 공연에선 감시가 따라 붙어 중단되기도 했지만! 경성 단성사에서 공연할 땐 관객이 수천 명이었다고! 우진이가 물건은 물건이야! 따라 갈 사람, 조선엔 없지, 없어. (신문 다시 쫙 펼치며) 우승해 이 작자, 완전 카멜레온이네. 연극하다가 총독부 나팔수 기자로 변신하더니, 이젠 축음기 사업이라?! 미꾸라지 같은 놈! 개성상인 집안이라더니, 사이토의 식민지 길들이기 여우 술책에 돈 되는 짓이면 뭐든 하겠다 이거지….
<제2장 : 그 여자, 그 남자>
1. 오사카. 1926. 7. 23-사건 발생 12일 전
-일동(닛또)축음기회사 녹음실. 윤심덕, 사내가 건네주는 악보 ‘사의 찬미’를 들여다본다.-
사내: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곡입니다.
윤심덕:제목이 ‘사의 찬미’, 죽음의 노래군요. (흥얼거리다) 원래 곡과는 좀 다르네요.
사내:누구나 따라 부르기 쉽도록 첫 소절과 끝 소절만 따 온 겁니다. 유행가란 그런 거죠. 중독성이 있어야죠.
윤심덕:중간의 밝은 멜로디가 다 빠졌군요.
사내:죽음을 노래한 곡이니까요. 경성에서 오실 때 듣고 오셨죠?
윤심덕:네. 그런데 이 곡을 처음 봐 제대로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사내:그게 더 좋습니다. 이 곡은 우리의 요청에 따라 윤선생이 즉석에서 부른 곡으로 알려질 테니까요. 시작할까요?
-반주 흘러나오고, 윤심덕 노래한다. 사내, 노래를 끊는다.-
사내: 목소리가 너무 밝아요. 느낌 좀 살려 봐요. 다시 갈게요. 반주~!
-윤심덕 다시 노래하지만 별 차이 없다.-
사내:(짜증을 내며) 컷! 너무 밝잖아요! 지금 행복한 노래 부르는 겁니까? 영혼이 없잖아요, 영혼이… 윤선생! 나 좀 봅시다!
-사내 무대 한 쪽으로 걸어 나오고, 윤심덕 따라 와 선다. 둘 사이에 긴장감이 감돈다.-
사내:윤선생, 당신 프로 맞아요? 계약 조건, 아시죠?!
윤심덕:(발끈한다) 네! 알죠!
사내:아니,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아는 사람이면 목소리가 이렇게 밝을 수가 없죠. 제가 계약 조건을 다시 상기시켜 드리죠. 윤선생은 이 녹음 마치면 죽어요. 죽기로 되어 있고….
윤심덕:(짜증) 알고 있다구요!
사내:그런데도 목소리가 그렇게 밝습니까?
윤심덕:(까칠하게) 천국에 가나 부죠!
사내:(음흉한 웃음) 그래요? 진짜 천국에 가고 싶은 모양이죠?! 하기야 뭐,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이야 없겠지만!
윤심덕:뭐라구요?
사내:(한심한 듯이) 윤선생, 보기보다 참 눈치가 없으시네. ‘사의 찬미’ 녹음하는데 3만 원 받기로 하셨죠? 다른 가수들은 한번 녹음에 보통 40원 받는 거 아시죠? 그것도 A급에서! 그런데 40원(현재 약 400만 원)과 3만 원(현재 약 30억 원)과의 차이라면, 파우스트가 메피스토에게 영혼을 판 정도에 해당하는 거액이 아닐까 생각되오만!
윤심덕:하고 싶은 말씀이 뭐죠?
-사내, 천천히 윤심덕의 주변을 돌면서 주머니에서 주사위 하나를 꺼낸다.-
사내:이게 뭔질 아시오? 주사위요. 난 이걸 하늘로 던졌다가 손바닥에 받았을 때, 1이 나오게 하고 싶은데… (쳐다보며) 윤선생 생각은 어떻소? 난 100프로 일 것 같소만! (사내, 주사위를 공중으로 던져 손바닥으로 받는다. 1이다)
사내:의아한 표정이시구만. 내가 왜 이 주사위를 던져 보일 것 같소? (뜸을 들이다가) 나는 이 주사위가 1이 나오게 하고 싶었고, 내 뜻대로 1이 나올 거요. 항상! 언제나! 왜냐? 만들어질 때부터 그렇게 설계 되었으니까.
윤심덕: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거죠?
사내:조선의 스타 윤심덕의 최고! 최후의 작품, 이이사쿠! 그래서 음반 넘버도 2249가 될 ‘사의 찬미’!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가 죽음 직전에 부른 ‘죽음의 노래’! 멋지지 않아요?! (목소리 깔고) 자, 이제 그만 녹음실로 가실까요? 윤선생!
-사내 앞서고 겁에 질린 윤심덕 뒤 따른다.-
2. 경성. 1926. 7. 31-사건 발생 4일 전
-조선축음기상회 경성지부. 물건이 배달된다. 우승해, 포장을 뜯으면 레코드 음반 ‘NO. 2249 사의 찬미’ 글자가 선명하다.-
우승해:(음반 건네주며) 이기자, 축음기에 한번 걸어 봐.
-이남구, 음반을 축음기에 걸면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흘러 나온다.-
이남구:우와! 소름끼치는데요.
우승해:(박수를 치며) 브라보! (우승해,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우승해:(보고하는 어투로) 네, 확인했습니다. 이이사쿠, 최곱니다. 하이! 하이! (전화를 끊고) 됐어. 완벽해. 이기자, 준비됐지?
이남구:그럼요! 이제 4일 남았습니다. D-day. 8월 4일! 순종 승하 100일째 되는 날! 사람들이 알까요?
우승해:사람들? 민중들을 말하는 건가? 알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민중들은 말이야. 아주 단순해. 마치 개, 돼지처럼! 길들이기 나름이야. (총 쏘는 흉내를 내며) 타앙! 총상 같은 거지. 죽거나 기절하거나. 첫 순간의 강렬한 충격! 그것만이 중요해! 뒤에 오는 것은 진실이든 아니든 아무 상관없어. 왜냐, 귀찮거든. 생각하기 싫어해. 이게 바로 민중의 진실이고 속성이지!
이남구:제목은 물론 자극적으로 뽑아야겠죠?!
우승해:그렇지! 달고 강렬하게! (잔인한 웃음)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단말마의 비명을 몰래 지켜보는 것 같은 쾌감을 주란 말이야!
김민수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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