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양 유천~ 동래까지 뻗은 황산도
- 대구·김해·울산·한양으로 이어져
- 황산역에는 역노만 수백 명 인데
- 찰방은 방구석 누워 점고도 미루니
- 이방 연수만 이리저리 바삐 일하네

밤에 개들이 짖는 것은 혼백 때문이라고 했지. 인간과 달리 개는 혼백을 본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오늘 밤에는 또 어떤 억울한 혼백이 이곳을 다녀간 것일까. 혹시 수명이 아버지, 바우는 아닐까. 그러고 보니 바우의 기일도 며칠 남지 않았다. 바우는 똑똑해서, 너무 똑똑해서 이승살이가 괴롭다고 했었지. 괴로움을 잊으려 술을 찾았지만 술이 옭아맨 신분의 굴레를 풀어주지는 못했다. 결국 바우는 제 몸 스스로 나뭇가지의 열매가 되었다. 열매가 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이보게, 연수. 자네만은 제발 나 같은 존재를 업신여기지 말게. 작청에 든다는 소식을 듣고 바우가 한 말이다. 같은 해에 태어나 삼이웃으로 자랐으니 죽마고우였던 두 사람. 하지만 하나는 커서 노비가 되었고, 하나는 자라서 역리가 되었으니 바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바우에 대한 회한 탓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짖어대는 개 울음 탓인가. 잠이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더 누워 있어 봤댔자 잠들기는 틀렸다 싶어 연수는 이부자리를 밀치고 일어났다. 밖으로 나서니 마당에는 허연 달빛이 흥건하게 고여 있다. 이제 이틀 뒤면 보름달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면 황산도에는 밤길을 재촉하는 장사치들로 넘쳐날 것이다.

	부산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마을 전경. 옛날에 한양으로 올라가는 황산도(동래~밀양)의 요충지 중 하나로 소산역 역참이 있었던 곳이다. 국제신문DB

황산도는 밀양 유천에서 동래까지 뻗은 길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길은 다시 대구, 김해, 울산으로 갈라져 한양까지 이어지는데, 길목마다 각종 공문서와 사신, 관수물자를 운송하는데 필요한 역마를 관리하는 역참이 있다. 역참 중에서도 황산도의 중심 역참이 바로 이곳 황산역이다. 황산역은 일반 속역과 달리 규모가 대단해서 종사하는 역노만 해도 수백 명에 이른다. 그러니 연수 같은 역리들이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일찌감치 아침밥을 챙겨 먹은 연수는 역참을 향해 종종걸음을 친다. 햇살이 퍼지기 전이라 그런가. 아니면 백로가 지나서 그런가. 금세 한기가 느껴지고 어금니에서 목탁소리가 날 정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속옷이라도 하나 덧입고 등청할 걸 그랬나. 괜히 후회스럽다. 연수는 역참의 정문인 남문으로 들어서자 외동헌 쪽으로 곧장 몸을 꺾었다. 찰방의 안부가 궁금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부임하자마자 한 첫 번째 일이 밥상머리에 앉아 미간 찌푸리는 것 아니었나. 그런 찰방이 이틀 동안 아프다고 누웠으니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외동헌에 도착하니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몸이 아직 안 좋은가. 연수는 몸을 돌려 이번에는 찰방의 숙소인 내동헌으로 향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움직이는 거라고는 불그스름해지는 감잎을 잡고 흔드는 바람뿐이었다. 연수는 천천히 마루 위로 올라섰다. 찰방이 잠든 방 가까이 다가가자 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난다. 이제 달라진 환경에 적응했는가. 깊은 잠에 빠진 게 다행이다 싶어 연수는 조심스레 돌아섰다. 그러고는 관청으로 향했다. 관청은 역참에서 관리들의 음식 관장하는 곳이니 이 시각에 제일 바삐 움직여야 할 공간이다. 하지만 남정네가 감히 들락거릴 수 없음에도 굳이 그곳을 찾아간 이유가 있다. 그건 찰방의 입에서 또다시 반찬 투정이 나오지 않게 당조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말도 꺼내기 전에 부엌마당에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말았다. 아궁이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그림자 때문이었다. 분명 볼점이네일 것이건만 연수는 수명이네를 본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관노 신분만 아니었다면 저곳에 있지도 않았을 수명이네. 여느 부엌데기와 달리 곱상하고 예뻤던 그녀였기에 관청의 관리치고 입대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지 않은가. 그랬기에 연수 또한 연정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받아준다면 그녀처럼 미천한 노비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바우에게 마음을 준 다음이었다. 그랬으니 그가 마음을 접을 수밖에. 그게 바우를 위해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우정이었다.

	회동수원지 쪽에서 하정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관청의 돌담을 에돌자 마방이 나타난다. 마방에는 역마들이 있다. 역참에서 가장 대우받는 이들. 나라의 중요한 문서를 전달하고 관수 물자를 운반하기에 항상 건강을 살피고 먹이조차 신경 써야 한다. 사람들은 모른다. 말이 얼마나 예민한 동물인지를. 말은 소와 달리 위가 작아서 수시로 먹이를 먹어야 하고 사료 또한 깨끗하지 않으면 곧잘 탈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마방꾼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존재들이다. 이곳 황산역에 대기 중인 말만 해도 무려 마흔 마리가 넘는다. 대마 7마리, 중마 29마리, 짐 싣는 복마(卜馬) 10마리 등 모두 46마리다. 그러니 말이 먹는 건초더미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연수가 마방 가까이 접근하자 말들이 일제히 부산을 떤다. 입에는 건초를 잔뜩 문 채로. 역시 마부영감은 부지런하다. 벌써 마방을 다녀가다니. 그런데 중마 한 마리의 표정이 어째 수상하다. 앞에 놓인 여물통의 건초까지 남아 있는 걸로 보아 탈이 난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입마에서 빼는 게 상책일 듯. 건초창고로 가니 아니나 다를까 마부영감이 건초를 물에 씻고 있다. 건초를 물에 씻는 이유는 당연히 청결을 유지하여 말의 소화불량을 막기 위해서다. 마부영감, 복마 한 마리가 어째 탈이 난 듯한데 확인했소? 예, 안 그래도 말씀 드리려고 했는뎁쇼, 아무래도 어제의 행마가 너무 과했나 봅니다. 나이 들면 인간이나 말이나 힘든 건 매한가진 모양입니다, 허허허. 그나저나 이방께서는 언제까지 수명이 글자 공부를 시킬 작정이오? 그거야 수명이 하기 나름이지요. 마부영감이 연수의 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건초창고에서 수명에게 글자 공부를 시킨 것도 벌써 두 달 가까이나 되었다.

언젠가 마방 앞에서 나누었던 수명과의 대화를 잊지 못한다. 그때 수명이 뭐라 했던가. 보기엔 똑같은데 어떻게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구분하느냐고 물었던가. 그래서 말해주었을 것이다. 사람도 달음박질이 빠른 사람이 있고 느린 사람이 있듯이 말도 재능이 다를 뿐, 좋은 말과 나쁜 말은 따로 없다고. 그랬더니 수명은 그런 재능은 또 어찌 알아보느냐고 되물었었지. 그래서 일러주었을 것이다. 보통 앞가슴이 쫙 벌어지고 다리와 목이 긴 말은 잘 달리고, 엉덩이가 낮아 다리가 짧은 말은 느리지만 힘이 좋아 짐 싣기에는 제격이라고. 그랬더니 수명이 한탄했었다. 자신은 아무래도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그때 연수는 도리머리를 했다. 아니라고, 수명이 넌 글자를 외우는 놀라운 재주를 타고 났다고. 그러면서 글자를 외우면 글자 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세상이 보인다고도 했었다. 그러고 나서 연수는 움찔 놀라고 말았다. 말하고 보니 그게 바로 수명의 아버지, 바우의 비극적 운명이었으니까. 그런 아비의 삶을 수명에게 얘기하고 있었으니 뜨끔할 수밖에. 이후 그는 수명과의 대화를 나눌 때면 조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 나리, 밤새 안녕하셨사옵니까? 연수의 등 뒤에서 맑은 시냇물 같은 목소리가 난다. 돌아보니 볼점이가 환하게 웃으며 서 있다. 아니, 이른 아침부터 볼점이가 웬일이냐? 내동헌 소제는 아직 멀었는데. 글쎄 말입니다, 집에 있으라고 해도 맨날 어미 도와준다고 이리 나오네요, 나리. 마침 물동이를 이고 우물로 향하던 볼점이네가 지나가다가 한마디를 던졌다. 어이쿠, 우리 역참에 이런 효녀가 다 있었다니! 볼에 점이 그냥 있는 점이 아니었구먼, 허허허. 연수는 모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자 볼점이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외로 틀었다. 이제 막 가슴앓이를 시작했다고 했던가. 연수는 엄마 뒤를 따라가는 볼점이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천한 계집종의 몸에서 어찌 저리 탐스런 것이 났을까 하고서. 사실 볼점이네는 아직 볼점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참의 사람들은 안다. 볼에 점이 있던 찰방이 근무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연수가 작청에 나타나자 호형호제하는 공방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연다. 젊은 찰방이라 내심 기대했더니 이건 웬 불상놈이 온 건 아니우? 이 사람아 말조심하게, 누가 듣겠네. 아니,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수? 그래도 찰방은 역참의 최고 관리라네, 상하의 규율을 우리가 어기면 어쩌나. 차암, 이방 형님도. 형님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소문을 아직 못 들었소? 무슨 소문을 말인가? 그 왜 찰방이 장희빈 치맛자락을 잡고 여기까지 불려왔다는 소문 말이우. 이 사람, 아무리 조정이 뒤숭숭해도 찰방이 얼마나 중차대한 자린데 일개 아녀자의 연줄을 타고 여기까지 내려온단 말인가. 세상이 뒤숭숭하니까 하는 말이잖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부임해오자마자 저리 방구석에만 뒹굴 수 있단 말이요? 물만 바꿔 먹어도 탈이 나는 게 인간이네, 그러니 자기 몫이나 잘하게. 연수는 그 말을 끝으로 밀린 역노들의 인사서류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방의 주된 임무 중의 하나가 역노들을 각자의 재능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관리, 감독하는 일이다. 그러니 역참의 모든 일을 도맡고 있는 셈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오늘도 관수 물자 운송과 병으로 결원이 생겼으니 인력 보충이 필요하다. 한데 공방의 말에 그만 귀가 쏠리고 말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공방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찰방이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사흘째. 그러니 무턱대고 작청에 앉아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 없는 형편이다. 연수는 서류철을 내던지고 내동헌으로 향했다. 찰방 나리, 이방이옵니다. 마루 앞에서 그가 왔음을 알렸다. 그래도 방문은 열릴 기미가 없다. 할 수 없이 마루로 올라서서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신임 찰방은 이맛살을 구긴 채 자신의 뱃구레만 쓰다듬어댔다. 부러 그러는 게 분명했지만 연수는 못 본 척 운을 뗐다. 나리, 오늘은 편찮으셔도 기운을 차리셔서 육방의 보고도 받고 관할 속역의 점고도 도는 것이 어떠실지. 연수의 말에 찰방이 언성을 높인다. 이봐요, 이방! 몸이 안 좋은 걸 낸들 어쩌겠소? 정 급하면 이방이 나 대신 역마 점고라도 하든가. 점고는 찰방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직접 돌아보심이…. 그러려면 기운부터 차려야 하는 거 아니오, 이거야 원 여기 와서 먹은 거라고는 풀밖에 없으니. 찰방은 토라진 어린아이처럼 돌아눕기까지 한다. 찰방의 말대로라면 이 모든 것이 병이 아니라 음식 투정이었단 말인가. 연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이방 나리, 불러 계시옵니까? 그래, 들어오게나. 작청 안으로 웬 급부 하나가 들어선다. 연수가 그에게 밀봉한 봉투 하나를 건넨다. 자네, 이거 동래부사에게 전하고 오게. 이게 무엇이옵니까? 신임 찰방이 긴 여정에 몸이 사달이 나서 인사가 늦는다는 전갈이네. 아하, 하며 급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가는 길에 소산역과 휴산역에 들러 일러놓게, 곧 점고 나간다고. 점고는 미리 알려주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니옵니까? 그럼 나더러 부러 그들을 혼내란 말인가? 제 말은 예전 이방들이 다 그렇게 했기에…. 말 먹이고 농사까지 짓는 것만 해도 고역이네, 더군다나 지금은 한창 들판에 살아야 할 때고. 그러자 급부가 연수 눈치를 살피며 얼른 고개를 꺾는다. 뭐하는가, 후딱 서두르지 않고? 아예, 알겠습니다요. 급부가 나가자 이번에는 볼점이네가 들어선다. 볼점이네의 두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부엌에서 설거지라도 하다가 부리나케 달려온 모양이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건만 볼점이네는 이리 바지런하다. 이거 먼저 받게. 이게 무슨 돈이옵니까? 찰방이 긴 여정으로 입맛을 회복하지 못한 모양이니 점심에 닭이라도 한 마리 올리게나. 그래도 너무 많은 돈입니다. 내 말은 좋은 닭을 사라는 걸세, 그리고 오늘부터 유념할 게 하나 있네. 유념할 것이라니요? 내지 출신이라 짠 음식을 싫어하는 듯하니 찬은 싱겁게 하고 젓갈이나 생선 같은 해산물은 올리지 말게. 알겠습니다, 나리. 볼점이네가 엽전을 쥔 채 작청을 나갔으나 연수는 은근히 걱정이었다. 몸이 재바른 건 좋으나 음식 솜씨야말로 수명이 어미를 따라가지 못하니까. 이런 까다로운 입을 한 찰방이 올 줄 알았으면 수명이네를 소산역으로 보내지 말걸 그랬다 싶다. 그랬더라면 수명이도 덜 고생이지 않을까. 그나저나 수명은 왜 안 보이는 거지.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내동헌에서 연기가 우럭우럭 피어오르고 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군불도 때지 않을 시기에 연기라니, 그럼 혹시 불이라도? 연수는 허겁지겁 내동헌으로 내달렸다. 내동헌은 지방관아로 치자면 내아에 해당한다. 하지만 종6품인 역참의 찰방은 가족과 함께 근무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역참은 교통의 요충지에 세워진 시설로 사신이나 관리들을 영접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여 내아는 내동헌이라 부르며 손님이 없을 경우 찰방이 혼자 독차지하게 마련이다. 간밤에 늦게 손님이 들지 않았다면 분명 찰방만 있을 공간에 무슨 불이 난단 말인가. 허겁지겁 내동헌으로 들어서니 계집종 하나가 눈을 비비며 군불을 지피고 앉았다. 묵은 아궁이니 쉽게 불을 지피기 힘든 것은 당연한 법. 한데 자세히 보니 볼점이다. 아니, 볼점이 너는 춥지도 않은 날씨에 여기서 뭐하는 것이냐? 그의 인기척에 볼점이가 화들짝 놀라 엉덩이를 든다. 찰방 나리께서 춥다고 군불을 지피라고 하셨사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연수는 할 말이 없었다. 상사가 명령했다니 어린 계집종으로서야 거역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조금 쌀쌀하긴 하지만 낮에는 기온이 올라가니 버틸 만한 날씨이지 않은가. 지금부터 군불을 때면 장작을 어떻게 감당하란 말인가. 땔감을 장만하는 것도 역참에 근무하는 이들에겐 고역이지 않은가. 적당히 지피고 두꺼운 솜이불부터 챙겨 내동헌에 깔아드리도록 해라. 알겠사옵니다, 이방 나리. 연수는 돌아서서도 고개만 가로저었다. 앞으로 역참이 어떻게 굴러갈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상섭 소설가

※역참=소산역(부산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마을) 황산역(경남 양산시 물금) 휴산역(부산 동래구 수안동 추정)

공동기획:부산시문화원연합회,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지식·문화콘텐츠연구소 리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