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언제나 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다. 왜 부산은 유독 뜨거울까. 해답은 최근 민주주의사회연구소가 발간한 '87년, 부산의 6월은 왜 뜨거웠을까'에서 찾을 수 있다. 학생·종교·노동·문화 부문까지 다방면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16명이 직접 집필했다.
저자들은 산업구조적 특성에서 먼저 해답을 찾는다. 6월민주항쟁 당시 부산의 산업구조는 노동집약적 성격이 강한 제조업과 서비스·유통부문이 주를 이뤘다. 1983년 통계에 따르면 전체 생산직 근로자 중 신발을 포함한 노동집약적 산업 종사자 비율이 67.9%에 달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부산은 경제가 불안할 때 직격탄을 맞는 구조였다. 1979년 2차 오일쇼크로 부산의 산업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서민의 삶도 흔들렸다. 정권과 사회에 대한 불만은 적극적인 시위 참여로 나타났다.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부산본부' 사무국장이었던 고호석(61) 씨는 "부산의 산업구조는 1970년대 노동집약적 구조에서 1980년대 중화학공업 구조로 전환하는데 실패했다. 부산 대표기업인 국제상사는 전두환정권 당시 일해재단에 돈을 내지 않아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대규모 실업사태도 발생했다"고 진단했다. 또 "노동자 세력은 4·19나 부마항쟁은 물론 6월항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진단했다.
부산양서협동조합의 역할이 컸다는 주장도 있다. 양서조합은 부산 중부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식인 그룹이 양서(良書)를 통해 시대적 문제를 함께 고민하자는 뜻에서 1978년 4월 22일 창립했다. 당시 매월 한 권을 읽고 사회 비판의식을 키웠다. 대학 내 비공개 서클이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양서조합은 강력한 구심력이 됐다. 책은 " 80년대의 숱한 탄압 속에서도 부산이 타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씨뿌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준영 기자 ljy@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