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당 합당·부산 민주세력 분열
- 항쟁기록 발굴·연구부족 겹쳐
- 재평가 할 기회놓쳐 과소평가
- 진상규명·명예회복 나서고
- 제약 많은 관련법 한계 보완
- 헌법전문에 항쟁정신 수록
- 재단 설립해 취지 살려야
부마민주항쟁은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총구였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 까지 부산과 마산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에 치열하게 맞섰다. 뉴욕타임스도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1979년 10월 18일 '체포된 사람의 절반이 일반 시민이었다는 사실은 정부에 대한 불만이 확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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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10월 부마항쟁 당시 중구 중앙동 옛 부산시청 앞에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삼엄한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국제신문DB·김탁돈 사진가 제공 |
영남 민심이 등을 돌리자 유신정권 내부에서도 균열이 생겼다. 그해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당했다. 4월 혁명이 이승만 정부의 몰락을 재촉했다면 부마항쟁은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역사학계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이 부마민주항쟁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부마항쟁은 5·18민주화운동과 달리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부마민주항쟁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부마항쟁법)'은 2013년에서야 제정됐다. 박근혜 정권에서 진실 규명작업은 지지부진했다. 부마항쟁을 기념하고 기념사업을 전담할 재단 역시 설립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5·18 기념재단과 4·3평화재단처럼 부마재단 설립을 통해 부마항쟁의 의미와 가치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역 항쟁'에 갇힌 부마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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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대 부마항쟁발원지 표지석. |
부마항쟁이 다른 민주화운동에 비해 과소평가된 원인은 다양하다. 우선 10·26 정변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지고 1980년 신군부가 권력을 찬탈하면서 부마항쟁이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1980년 광주 학살의 주범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민주주의가 다시 암흑기로 접어든 탓이다. 여기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과 부산 민주세력의 분열이 한 원인으로 꼽힌다.
공식기록의 발굴과 연구부족도 빼놓을 수 없다. 실제로 부마항쟁 기간 87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됐지만 부산 참여자들의 재판기록은 지금껏 공개되지 않고 있다. 부마항쟁을 다룬 국내 박사학위 논문도 몇 편 안된다. 부마항쟁 박사논문 제1호는 2008년 3월 정유경(41) 씨가 일본 가고시마 대학에서 인준받은 '한국의 민주화 과정과 사회운동-부마지역의 민주화운동을 중심으로'이다.
제2호는 민주주의사회연구소 차성환 소장이 2009년 부산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은 '참여 노동자를 통해서 본 부마항쟁 성격의 재조명'이다.
차 소장은 "부마항쟁은 짧은 기간 부산·마산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또 6월민주항쟁처럼 민주화라는 결실을 맺기도 전에 전두환 정권이 권력을 잡아 재평가 시도가 이뤄질 수 없는 사회분위기였다"고 아쉬워했다. 3대 민주화운동인 ▷4·19 의거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전폭 지원을 받고 있는 반면 부마항쟁은 행정기관과 학계의 관심 밖에 놓였다.
부산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송기인 신부는 부마항쟁 24주년 연구논총 발간사에서 "(부마항쟁 연구는) 4·19나 5·18 그리고 6월 항쟁에 비해서도 부진했다. 아니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통탄했다.
■재단 왜 만들어지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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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마항쟁 직후 계엄사는 신문 사진 크기까지 통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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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기념재단을 설립해야 한다는 데는 부마항쟁 당사자와 전문가 모두 같은 의견이다. 부마항쟁법에도 재단 설립을 명시한 규정이 있다.
문제는 순서다. 재단 설립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부마항쟁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부마항쟁법 제정에 따라 2014년 10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부마심의위원회)'가 출범했다. 문제는 위원회 구성이었다. 지난해 10월 부마심의위원회는 2기 활동을 시작하면서 뉴라이트 교수를 위원으로 선임했다. 1기 위원회에 참여했던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부산대 10·16 민주항쟁기념사업회·부마민주항쟁경남동지회 소속 실무위원 4명은 "편향된 인사들로 구성된 위원회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다"며 위원회 불참을 선언했다.
당시 실무위원으로 참여했던 차 소장은 "9명의 위원 중 6명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거나 뉴라이트 계열 학자였다"며 "전문성도 없는 인사들에게서 올바른 진상규명 보고서가 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부마항쟁법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부마항쟁 피해자로 인정받기 위해선 피해 인과관계를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데다 생활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기준도 구금 30일 이상이어야 해 사실상 제대로 된 명예회복이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부마심의위원회에 지난 2월 28일까지 접수된 피해건수는 194건에 불과하다. 부마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1560명(정부 추산)인 것이 비하면 10분의 1 수준이다. 이 중 실무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 보상금을 받은 사례는 55건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올해가 재단 설립에 나설 적기라고 보고 있다. 6월민주항쟁이 30주년을 맞은 데다 문재인 대통령이 5·18과 부마항쟁 정신을 헌법 전문에 추가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부산대 김희재(사회학) 교수는 "부마항쟁이 부산과 마산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으려면 중심에 부마항쟁 재단이 있어야 한다"며 "문재인 정권은 부마심의위원회 재구성을 통해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고 재단 설립에도 적극 나서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이준영 기자 ljy@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