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으로 깎고 칼질하다 부상 일쑤
- 작업장 연탄가스·본드냄새 고통
- 고급수제화 다방 아가씨들 주문
- 부산서 서울 진출 업체까지 생겨
- 명절엔 주문 몰릴 정도로 초호황
- 요즘엔 발이 특이한 사람이 찾고
- 후배 양성이 잘 안될 정도로 위축
- 돈벌이보다 '천직'에 위안 삼아
1970년대 부산에서는 손으로 신발을 일일이 만드는 수제화(手製靴)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조상환(64) 씨도 그 중 한 명이다. 충북 영동이 고향인 그는 1974년 기술을 배우러 부산에 왔다가 수제화 제작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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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수제화 제작과정은 기술자인 '선생'과 그 밑의 견습생들에 의한 도제식으로 이뤄졌다. 사진은 1974년부터 수제화 일에 종사하고 있는 조상환 씨. |
"당시에 주로 남포동과 서면 지역에 제화점들이 몰려 있었죠. 내가 일한 가게는 서면 '세븐틴'이라는 곳이었어요. 그때 제화점들은 신발 파트별로 선생이 여러 명 있었고, 그 선생 밑에 상·중·하 (등급별로) 견습을 두었습니다. 하견습에서 상견습까지 올라가는데 보통 3~4년 걸리고, 선생으로 불린 기술자가 되려면 7년도 빠르다고 했었죠. 20년 되도록 선생이 못 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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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환 씨의 수제 구두. |
제화점에 처음 하견습생으로 들어가면 목형 라스트(신발틀)에 갑피를 못으로 고정하는 일을 했다. 선생이 본드로 고정시키면, 못을 전부 뽑아내는 일을 하고 그 외에도 잔심부름을 했다. 중견습은 굽에다 가죽을 싸는 작업을 맡고, 상견습은 신발창을 오려 붙이는 걸 배웠다.
"넓은 판에다 규격을 맞춰서 그라인더로 밀고 가는 거죠. 지금처럼 쭉쭉 찍어내는 게 아니고 일일이 손으로 깎아서 만들었어요. 요즘은 신발 '징'도 사출해서 규격대로 나오지만, 그때는 전부 칼로 깎고 그라인더로 갈아서 만들었죠. 수제화는 칼질을 많이 하는데, 고무판이 무거워서 힘을 가해 자르다 보면 손을 잘 다쳐요. 통굽을 만들 때는 두꺼운 스펀지 같은 거를 장판지 위에 올려놓고 자르는데, 장판지까지 칼이 들어와서 째지기도 했어. 그렇게 다치는 건 예사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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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형태의 신발틀과 도구 등이 갖춰진 수제(手製) 제화점의 작업실. |
게다가 좁은 공간에 열댓 명이 쪼그려 앉아서 작업을 했다. 비좁은 틈새로 지나가기 위해 서로 등을 타고 넘어가는 게 다반사였다. 겨울에는 날씨가 춥다고 작업실 문을 꽉꽉 닫아 놓으면 연탄난로 가스 냄새에 시달렸다. 더운 여름철에 본드로 접착 작업을 할 때는 열을 가하고 선풍기 바람이 없는 방향에서 붙이느라 무척 힘들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까지 일명 '싸롱화'(고급 수제화)라는 게 유행했어요. 신발을 1차로 가봉한 걸 손님이 신어 보고, 원하는 부분을 수정해 납품하는 방식이라. 완전 맞춤으로, 제대로 된 수제화였지. 부산에서 싸롱화로 유명해져 서울까지 진출했던 '브라운 양화점'이란 곳이 있었어요. 그곳에는 '알렉산더'라는 전문 브랜드 부서가 따로 있었죠. 내가 거기에 잠깐 있었지만 나만의 기술로 신발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26살 때 자립해서 나왔지. 그 시절 여화의 가장 큰 특징은 통굽으로, 다방 아가씨들이 주로 주문했어요."
경북 안동이 고향인 박종준(가명·56) 씨는 어릴 때 고향의 양화점에서 심부름을 하며 신발 만드는 일을 처음 접했다.
"그러다가 열 일곱 살 무렵에 가족과 부산으로 이사를 와서 동양고무 하청공장의 잡부로 일했어요. 그때 제품이 기차표 아동화였죠. 공장에서 신발 제품이 찍혀나오는 걸 보고 있자니 수제화 생각이 많이 났어요. 결국엔 내 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공장을 3개월 만에 그만두고 나와서 여기저기 양화점을 돌아다니며 수제화 기술을 다시 배우게 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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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손으로 일일이 만들어낸 수제 구두 제품. |
1980년대는 수제화 일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경제가 성장할 시기여서 명절 때가 되면 주문량을 맞추느라 무척 바빴다. 며칠 쉬지도 못하고 잠 자는 시간도 부족했다. 그때는 수제화 한 켤레를 제작하는데 보통 일주일이 걸렸다.
"과거 수제화 기술자들은 양화점을 옮겨다녀도 금방 소문이 나고, 한 다리 건너면 서로 아는 사이죠. 내가 멋대로 디자인하고 다른 양화점에 가면, 뒤에 후임으로 온 사람으로부터 뒷말이 나오기까 조심스러웠죠. 칭찬은 소문이 늦는데 나쁜 얘기는 빨리 퍼지잖아요."
그는 부산에서 양화점을 운영한 지 24년 됐는데 주위의 양화점들이 많이 없어졌다며 안타까워 했다. 수제화를 하러 오는 사람이 적고 수입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박 씨는 그 사이 수제화 가게를 두 차례 접고 다른 분야 일도 했지만, 결국 수제화로 돌아왔다. 요즘 수제화를 찾는 사람들은 발이 좀 특이하거나 젊을 때부터 맞춰 신은 경우, 그리고 양쪽 발 사이즈가 다른 사례가 주류를 이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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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제화 제작 과정에 쓰이는 공구. |
세월이 흐르면서 수제화는 대기업의 브랜드 신발과 인터넷 구매 추세에 점차 밀려났다. IMF 외환위기 전보다 수제화 생산량이 15%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수제화 제조기술을 배우려는 이들이 거의 없어 후배 양성이 잘 안 될 정도로 열악하다. 수제화에는 각 전문파트가 있는데,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대체인력 구하기가 힘들다. 마치 잘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바퀴 하나가 빠지는 거와 같다고 조상환 씨는 설명했다.
"그동안 안 해본 신발 디자인이 없어요. 내가 디자인한 대로 신발이 나오고, 간혹 학생들이 디자인 스케치를 해온 걸 만들어내는 재미가 있죠. 처음엔 그냥 먹고 살려고 수제화 일을 했지만, 이젠 돈벌이보다 내 천직으로 생각해요. 수제화를 만든다는 자부심이죠."
구술 채록=김정연
글 구성=구시영 선임기자
기획: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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