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려운 가정 탓에 학교 못 가고
- 가족 생계 돌보느라 학업 포기
- 어린 직원들 '야학' 주로 다녀
- 공장 월급 고향에 몽땅 보내
- 자신의 학비 벌기 위해
- 공장 마친 뒤 식당일까지
- 재봉부문 '학생조' 따로 편성
- 수업 안 보내주는 조장도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 부산 신발공장 노동자 대부분은 학력이 낮았다. 중졸 고줄이 드물었고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한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시대적 환경과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학교에 갈 수 없었고, 가족 생계를 돕느라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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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부산 신발공장 직원 중에 낮에 일하고 밤에 '야학'(야간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청소년들이 많았다. 사진은 1980년대 신발공장에서 작업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 국제신문DB |
■낮에 일하고 밤엔 공부
"옛날 어른들은 '여자애가 공부해서 뭐 하노, 시집 가서 살림 살면 되지' 라고 해서 학교에 잘 보내주지 않았어. 그런 시절이었으니, 내가 일했던 공장의 나이 든 여자 직원 중에는 글을 모르는 이들이 더러 있었지."
김순달(72) 씨의 30여년 전 기억이다. 까막눈의 직원들로 인해 작업 중 엉뚱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신발에 글자를 뒤집어 박거나 사이즈(크기)별로 맞춰야 하는데 다른 것을 섞어놓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동료들의 작업시간에 피해가 갔고, 관리자들로부터 구박을 받기도 했다.
신발공장의 어린 직원 중에는 일을 마친 뒤 '야학'(야간학교)에 다니는 이들이 많았다. 배움과 학업에 목이 말랐던 까닭이다. 그런데 당일 생산물량을 못 맞추거나 일이 덜 끝나면, 공장 조장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잘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면 아이들은 학교 못 간다고, 학교시간 늦다고 울고불고 난리였다. 그것을 본 김 씨는 너무 안쓰러워 아이들한테 가서 작업을 거들어 주곤 했다.
"내가 처음 일했던 공장에는 미싱(재봉) 직원이 500명 정도 됐는데, 부산 토박이는 거의 없고 대부분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었죠. 학교를 못 다닌 사람이 태반이고 중학교 졸업도 별로 없었어요. 내가 입사할 때 면접담당자한테 '고등학교 졸업했다'고 하니까, 그분 하는 말이 '여기서는 거짓말하면 안 된다. 초등학교 나왔냐, 중학교 나왔느냐 솔직하게 말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 진짜 진주여고 나왔다'고 말했죠. 나중에 면접담당자의 친척 딸이 저와 고교 동창이고 같은 반에 있었던 사실이 알려졌지요."
집안 사정으로 대학의 꿈을 포기하고 중소 신발공장에서 근무했던 강윤희(62) 씨의 에피소드이다. 재봉부 '시다'(보조원) 일 등을 거쳐 회사 경리를 맡았던 그는 생소한 회계업무에 곤란을 겪었지만 관련 책을 사서 밤낮으로 독학을 한 끝에 어려움을 이겨냈다.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신발공장에 다녔던 김성연(55) 씨. 그가 가장 부러웠던 것은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는 또래 아이들이었다.
"공부하고 싶어서 엄마한테 '나도 학교 보내줘. 왜 자꾸 나를 공장에 보내는데' 하고 싫은 소리를 했죠. 그러면 엄마는 아무 말씀 안 하시고 가만히 있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엄마한테 너무 미안하고 가슴이 아파요. 우리 엄마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자기 자식 학교도 못 보내고 가난 때문에 공장으로 보내야 하는 그 속마음…. 내가 철이 없을 때라서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거죠."
당시 신발공장의 재봉 부문은 1개 라인에 보통 20명 정도가 한 조를 이뤘다. 그 중에서 학생 2, 3명이 같은 라인에 들어 있었다. 어떤 곳은 학생들로만 편성된 '학생 라인'이 따로 있었다. 그들은 공장에서 오후 4, 5시쯤 되면 학교를 가야 되는데 학생 2, 3명이 빠지면 작업 흐름에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작업조장의 성향에 따라 그들을 학교에 잘 보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애초 회사 측은 시골 등에서 나이 어린 인력을 데려올 때 공부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공장에서는 그것을 잘 지키지 않았다.
"그 시기에 대학생들이 야학 봉사를 많이 했어요. 저는 동생들 학비와 집안 생활비 대느라 배우러 다니는 건 꿈도 안 꿨죠. 그런데 성당에서 하는 야학은 돈을 안 내도 된다고 하길래 따라갔죠. 당감동 성당에서 부산대 학생들이 공장사람들을 대상으로 밤에 공부를 가르쳤어요."
당시 김 씨는 23살 정도였는데, 같은 또래 대학생들한테 중학교 과정을 배웠다. 공장일 마치고 1주일에 너댓번씩 1년 가량 다녔다고 한다. 야학 뒤 막차 타고 늦게 집으로 왔는데, 어머니가 늘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학비 벌려고 밤에 식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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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발업체 부설학교였던 부산 삼화여상의 1992년 졸업식. 1978년 개교한 이곳은 모기업인 (주)삼화(삼화고무)의 경영난과 폐업으로 1993년에 폐교를 맞았다. 국제신문DB |
1980년대 국제상사 신발공장에서 일했던 최연화(52) 씨. 전남 화순이 고향인 그는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15살 때부터 신발공장에 다녀야 했지만 그의 목표는 학교 공부였다. 교복 입고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공부를 하고 싶은 열망이 항상 가슴 속에 있었다.
"(사상구) 감전동에 무슨 학교였는지 기억이 흐릿한데, 그때 공장의 친한 동료가 그 학교를 다녀서 나도 같이 다니게 되었어요. 그런데 잠깐 다니다 말았죠. 그 학교 마치면 졸업장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미인가 학교라 검정고시를 봐야 했었죠."
최 씨는 월급이 적었지만 거의 전부를 고향으로 보냈다. 두 남동생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였다. 그 외 자신이 학교에 다닐 돈을 따로 마련하려고 공장일 마치면 사상시장 인근 식당에서 밤 10시까지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제가 그 식당에서 번 돈으로 우리 셋째 언니 결혼할 때 금반지 해주고 저는 검정고시도 볼 수 있었어요. 오로지 돈 모아서 학교 다니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이겨냈던 거 같아요. 제가 모은 돈을 가지고 더 늦기 전에 고등학교에 간다고 하니까 부모님과 고모들이 반대하고 난리였어요. 제가 버는 돈으로 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학교 다닐 생각에 고향으로 돌아갔죠. 평소 (돈 아끼느라) 물건 같은 것을 사지 않고 지내다 보니, 부산에서 고향으로 갈 때 가방 한 개가 전부였어요."
귀향해 화순여고에 들어간 그는 열심해 공부했다. 그리고 광주대학교에 입학해 졸업했다. 세 딸을 둔 그는 신발공장 시절 야학에 같이 다녔던 경희라는 친구, 그리고 어린 나이의 자신에게 재봉일을 잘 가르쳐줬던 부산의 예쁜 그 언니가 너무 그립다고 말했다.
박봉의 월급을 쪼개서 자비로 봉사활동을 하는 공장 직원들도 있었다. 국제상사 신발공장의 강경순(61) 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어느 날 남자 직원 한 분이 우리 공장의 각 부서에 아는 몇몇 사람들을 모아서 좋은 일을 해보자고 제안한 게 계기였어요. 그 모임 회원들은 정말 마음이 착한 동료들이었죠. 일요일 쉬는날에 송도 소년의 집, 당감동 양로원, 수정동 고아원 등으로 가서 봉사활동을 했어요. 그기서 빨래하고 연로하신 분들 밥 먹여드리고 일손 돕는 거지요."
이들은 월급의 일부를 떼어내 불우 아이들이나 양로원 어르신들께 드릴 선물을 마련하기도 했다. 강 씨는 1976년 사상성당의 첫 영세자였는데, 그 성당의 강당을 빌려서 아이들에게 줄 노트를 포장하고 봉사회원들과 앞으로 활동에 대해 토론했던 기억이 선하다. 그런 봉사활동은 그가 시집 가려고 공장을 그만두는 날까지 계속 이어졌다.
구술 채록=김정연
글 구성=구시영 선임기자
기획: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