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쪼들리는 살림 돈 아끼려고
- 밥 대신 공짜 국수로 연명
- 일 마친 뒤엔 거리서 떡 팔아
- 한푼이라도 더 벌어 생활비로
- 수기로 작성한 월급명세서
- 동전까지 일일이 봉투에 담아
- 한 달 월급 외상값으로 다 갚고
- 다시 외상 다는 사람 부지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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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절 공장에서 신발 하나를 최종 완성하는데 사람(직원) 손이 모두 52차례 들어갔다고 한다. 사진은 1970년대 부산 국제화학(국제상사 전신) 신발공장에서 운동화를 생산하고 있는 모습. 부산박물관 제공·국제신문DB |
■공장일 외에도 떡장사로 생계
김춘자(69) 씨는 삼화고무 공장에 다녔다. 둘째 아이가 네 살일 때 남편이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혼자 생계를 떠안았다.
"공장에서 운동화 갑피에 풀칠하는 일을 먼저 했지. 접착제 냄새가 심했지만 그런대로 참을만 했어."
얼마 안 되는 공장 월급으로는 두 아이를 공부시키고 살림 꾸리기가 참 어려웠다. 그래서 공장에 점심 도시락을 싸 가지 않고 굶는 날도 종종 있었다. 구내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면 되지만, 월급에서 밥값 떼이는 것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도 돈이 짜치면 세 들어 살던 집주인에게 돈 빌려서 이자 갚고 그랬어. 그러다 도저히 안돼서 떡장사를 시작했지. 공장 일 마치고 나면, 범일동 굴다리 옆 떡공장에서 물량을 떼다가 머리에 이고 영도로 가서 팔았어. 배 고파도 꾹 참았다가 떡이 다 팔리면 대야 바닥에 남은 콩가루를 입에 털어 넣었어. 공장에서 야간 작업하고도 시간이 남으면 떡 팔러 나갔지. 밤 늦게까지 일하고 잠을 제대로 못 자니까 공장에서 작업 중 졸다가 가위에 손을 많이 베였지. 공장이 쉬는 날에도 아침부터 떡장사를 나갔으니 쉬는 날이 거의 없었제."
당시 그의 큰애가 사립중학교에 다녔는데, 학비는 많고 살림은 팍팍해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게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집에 내가 없어도 큰아들이 밥 차리고 동생을 잘 보살펴서 우리 동네에서는 착한 아들이라고 소문이 자자했어. 아들하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어느 날 퇴근해 보니까 큰아들 녀석이 못 보던 가방을 하나 갖고 있는 거야. 혹시 나쁜 맘 먹고 남의 거 도둑질했는지 막 물어보니 이웃집 친구가 안 쓰는 가방을 자기한테 준거라고 하더군. 아들이 찢어진 가방 때문에 늘상 보자기에 책을 싸서 매고 다니니까 그 친구 녀석이 안쓰러웠나봐. 그 친구도 그리 잘 사는 집 아이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는 살림살이가 너무 힘겹고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다는 생각에 종종 눈물이 났다. 남편의 빈자리와 그에 대한 그리움, 두 아이와 생활비 걱정, 헤어나오지 못하는 가난 등이 그의 어깨와 마음을 짓눌렀다.
"그 시절엔 동네에 TV가 있는 집이 아주 드물었는데, 어느 날 우리 옆집이 TV를 산 걸 보고 너무 신기했어. 아침에 일어나면 그 집에 TV를 보러 갔지. 공장에서도 같은 부서 직원들한테 '니들 TV 보려면 빨리 일해라' 하고 소리를 치고도 했어. TV가 있던 집의 부인도 같은 공장에 다녔는데, 그가 일을 빨리 마쳐야 TV를 볼 수 있어서 그의 작업을 도와주고 그랬지. 그 정도로 TV 보는 재미에 푹 빠진 적도 있었어."
■딱 1주일만 나와주소
표임덕(76) 씨는 서른 네 살 때 의령에서 부산 구포로 이사왔다. 촌에서 농사만 지어서는 생계가 힘들고 아이들 교육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국제상사 작업반장이던 이웃집 아저씨가 어느날 "(공장에) 자리 하나 비었는데, 내일 당장 누구를 데려가지 않으면 내가 곤란하다. 그러니 딱 1주일만이라도 공장에 나와달라"고 사정했다. 그로서는 돈을 벌기 좋은 기회였다.
공장에 간 그는 장화 만드는 부서에 먼저 들어갔다. 그곳에서 이것저것 시키는 일을 다했다. 하지만 지독한 고무·본드냄새로 머리가 어지럽고 아파서 점심을 먹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선임자들의 괄시로 서러움을 많이 느꼈다.
"점심 도시락 대신 회사 식당에서 먹는 사람은 본인이 밥값의 절반을 부담했어. 그런데 국수와 빵은 공짜였지. 나는 식당 밥값이 아까워 줄곧 국수를 먹었어. 5개월 동안 국수만 먹으니까 나중에는 국수가 안 넘어가는거라. 그래서 밥 먹는 사람 옆에 붙어서 김치 쪼가리 얻어먹고. 몇 년 그렇게 하니까, 우리 조장 할매가 '아이고 이 사람아. 이제 밥 좀 묵으라! 지금까지 국수 먹은 거 늘어트리면 부산~서울 몇 번이고 왔다갔다 했겠다' 하더라구. 그 당시는 종일 일하고 오후가 되면 배가 너무 고팠어."
그는 장화에 풀 붙이는 일을 하다가 이후에는 일명 오버로크(휘갑치기), 미싱 작업을 맡았다. 신발 안 바닥에 천을 덧대는 것이었다.
"재봉을 하다 보면 가끔 불량이 나와. 안에 천을 덜 댔든가 빠졌든가 아니면 째졌든가 하는 것들이지. 그런 거는 다 내버려. 못 쓰거든. 한 달 지나서 남은 것들을 모으니까 신발 작은 거 하나는 만들 수 있겠더라고."
그는 1주일은 낮에 일하고, 다음 1주일은 밤에 교대근무를 했다. 밤새도록 미싱을 밟고 나면 발이 부어서 퇴근할 때 신발 신기가 힘들었다.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까 아이 둘은 지들이 알아서 컸어. 남들처럼 학원에 보낸 것도 없고. 애들 고등학교 졸업식에도 못 가봤어. 공장에 안 나가면, 받는 돈이 그만큼 작아지니까. 애들 군대에 갈 때도 나가보지 못했어."
그 시절에는 신발 만드는데 사람 손이 많이 갔다. 고무가루를 부어 반죽하고 찍어내서 밑창 만들고. 이를 포함해 신발 하나 만드는데 모두 52번의 손이 갔다. 신발 한 켤레가 두 개니까 104번인 셈이다. 삼화고무를 거쳐 중소 신발공장에서 일했던 김순달(74) 씨는 "신발 한 켤레 완성하는 게 그렇게 힘들다는 걸 알고 나서는 아이들한테 신발을 구겨 신지 말라고 당부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김 씨가 일했던 공장에서는 회사 측이 생산을 많이 하는 '조'에게 상품이나 상금을 주기도 했다.
■노란 봉투의 월급 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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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의 월급봉투. |
컴퓨터와 전자기기가 없었던 당시로서는 월급 계산을 주산과 수기(手記) 등으로 했다. 중소 공장에서는 직원 수백 명의 카드를 가지고 시급 계산을 하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필기로 종이에 계산표를 작성하면, 가로·세로 수치가 딱 맞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부 새로 작성해야 했다. 회계 일을 맡았던 강윤희(62) 씨는 "어느 땐 1원이 맞지 않아서 밤을 새워 작업한 적도 있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일했던 중소 공장의 현장 월급은 7만~8만 원이었다. 공장이 커져서 직원 수가 1000명 정도 됐을 때, 월급날 은행에 현금 1억 원 가량을 찾아러 가서 큰 마대자루에 돈을 담아 가지고 왔다. 노란 월급봉투에다 만 원짜리, 천 원짜리 지폐와 동전을 일일이 세어서 넣었다. 그런데 지폐를 잘못 넣는 경우가 생겨서 마지막에 돈이 맞지 않으면 작업했던 월급봉투들을 모두 다 풀어서 재확인해야 했다.
"월급을 나눠주고 나서 어떤 직원은 봉투에서 만 원 지폐 한 장을 몰래 빼낸 뒤 돈이 모자란다고 항의하는 일도 있었죠. 워낙 돈에 예민한 시절이라 1원이 부족해도 월급봉투 들고 사무실에 찾아왔어요. 그런 사람들이 꽤 있었어요. 월급날에는 공장 앞에 외상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퇴근시간 맞춰서 외상장부 가지고 줄을 길게 서 있어요. 월급날 돈을 다 털리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리고 다시 외상 달고."
구술 채록=김정연
글 구성=구시영 선임기자
기획: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