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 퇴진운동의 또 다른 이름은 '6월민주항쟁'이다. 군사정부가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묵살한 데 이어 이한열 열사가 6월 9일 최루탄에 맞아 숨지자 전국에서 150만여 명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부산에선 박종철 열사가 숨진 1월부터 아스팔트가 민주화 열기로 달아올랐다. 박 열사를 기리는 '2·7 추도대회'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부산본부(부산국본)의 결성은 부산의 6월을 달군 불쏘시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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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6월 27일 고 노무현(영정을 든 이) 전 대통령과 문재인(노 전 대통령 왼쪽) 대통령이 이태춘 열사의 영정사진을 들고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이태춘 열사는 그해 6월 18일 전두환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
■87년 6월의 기억들
6월민주항쟁 주역들은 '2·7 추도대회'를 주목한다. 부산국본 상임집행위원이던 배갑상(65) 씨는 "물 고문으로 숨진 박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기획된 집회에 대학생과 종교계는 물론 어마어마한 넥타이부대가 쏟아져 나왔다"고 회상했다. 부산국본 사무국장이었던 고호석(63) 씨는 "최루탄이 터지는데도 노무현·김광일 변호사는 피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고 말했다.
2·7추도대회 하루 전인 6일부터 부산은 1980년 5·18 전야처럼 긴장감이 감돌았다. 경찰은 전역에서 검문을 벌여 200명 넘게 연행했다. 7일 오후 2시. 약속 시간이 되자 부산 중구 남포동 부산극장 앞에는 수백 명이 모여 경찰의 최루탄을 뚫고 행진했다.
"죽은 사람 추모제도 못 하게 만드는 곳이 나라냐"는 외침과 '애국가' '타는 목마름'이 거리에 메아리쳤다. 경찰은 당시 집회인원을 700명으로 추산했으나 주최 측은 1만 명 이상으로 발표했다.
부산국본 공동대표였던 문정수 전 부산시장도 이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당시 국회 내무위원이던 내가 박종철 열사의 사망 원인을 맨 처음 보고받았어. 너무 터무니없어 고문 반대운동과 최루탄 추방운동을 전개했지. 2월 7일 남포동에 가니까 경찰이 나를 납치하다시피 북구 구포동 어디론가 끌고 가더라고. 경찰은 그걸 '퍼내기 작전'이라고 불렀어."
박 열사의 49재에 맞춰 '3·3추모기념행진'이 남포동·충무동과 공단지역인 사상구에서 전개됐다. 4월 1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직선제를 거부하는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성난 민심은 극에 달했다. 5월 17일 서면 복개천에서 황보영국 열사가 분신하면서 투쟁 열기는 더욱 불타 올랐다.
5월 20일 전국에서 가장 먼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부산에 꾸려졌다. 노무현·문재인·고호석·배갑상을 비롯해 13명이 상임집행위원을 맡았다. 야당 국회의원과 종교계 대표 12명은 상임대표를 맡았다.
6월 10일 30만여 명이 서면~부산역까지 행진하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기독교청년 단체 소속으로 6월항쟁에 참여했던 김해몽 부산시민운동지원센터장은 "정부 말만 앵무새처럼 전하며 편파 왜곡보도를 한 지역 방송국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시위도 벌어졌다"고 회상했다.
6월 21일 부산에서만 806명이 경찰에 연행되는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마침내 전두환 전 대통령은 6·29 선언을 발표하며 국민에 항복했다. 그해 10월 27일 국민투표로 개헌이 확정되면서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됐다.
배 씨는 "88년 서울올림픽을 위해 86년부터 서머타임제를 시행한 것은 전두환의 실수였다. 여름이 되면서 해가 길어지자 일을 일찍 마친 넥타이부대가 가세해 투쟁 규모가 훨씬 커졌다"고 말했다.
■'야도(野都) 부산'의 과제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면 행동부터 하는 게 부산시민의 기질 아닙니까."(배갑상 전 부산국본 상임집행위원)
6월민주항쟁뿐 아니다. 1979년 10월 박정희 유신정권의 종언을 알린 '부마민주항쟁'도 부산의 역사다. 고호석 씨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쐈던 것은 탄탄한 지지기반으로 여겼던 영남의 민심이반과 민주화에 대한 요구로 정권 핵심부가 분열됐기 때문"이라며 "1980년 광주민주항쟁도 부마항쟁의 영향이 컸다"고 평가했다.
부산은 '촛불혁명'의 진원지였다. 지난해 10월 '박근혜 하야'를 외치는 촛불집회는 서울 광화문으로 집중됐다. 12월 3일 부산 서면에 2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리자 대구와 호남 시민단체도 지역별 집회를 열었다. 부산 현대사를 연구 중인 동아대 홍순권(사학과) 교수는 "역사를 대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는 '기억하는 것'이다. 부산이 이뤄낸 쾌거는 현재를 사는 우리의 정신적 동력이자 미래세대의 자긍심"이라며 "이제는 부산의 현대사를 공교육으로 다룰 때"라고 말했다.
부산대 김희재(사회학과) 교수는 "6월항쟁의 과실을 정치인들이 독식하면서 '부산의 봄'을 이끌 시민사회가 강화되지 못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조직화된 시민과 함께 각계각층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광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화영 이준영 기자 hongda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