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발공장 인력 수급 어려워
- 전라도까지 가서 여공 데려와
- 어린 나이에 돈 벌러 온 소녀들
- 밤까지 작업하다 손 퉁퉁 부어
- 기숙사는 자취방 비하면 호텔
- 취침 전엔 군대처럼 인원 점호
- 동생들 뒷바라지·부모 도우려
- 받은 월급 대부분 고향집 보내
■여공 데리러 전라도로
"그때 우리 회사 통근버스가 100여 대, 기사는 80명 정도 됐지. 요즘처럼 좌석버스 형태가 아니라, 창문 양 옆의 의자와 뒷좌석을 빼고 전부 입석이었어. 사람을 많이 태워야 하니까 그랬지."
김수용(79) 씨는 서른 살 무렵인 1969년 국제고무(국제상사)의 통근버스 기사로 입사해 근무했다. 그를 포함해 기사들은 하루에 두 대의 차량을 맡았다. 아침에 직원들 출근시키고, 낮에는 트럭으로 화물(신발자재, 완제품)을 운반하다 퇴근시간에 다시 통근버스를 몰았다. 지금은 버스가 자동문이지만 그 시절에는 조수가 운전석 옆에 타서 문을 열고 닫았다. 김 씨는 통근버스를 몰기 위해 아침 4~5시에 일어나 출근했다. 당시 국제고무 공장은 동구 범일동 조방(옛 조선방직) 앞에 있을 때라 자신의 거주지인 안창마을에서 걸어갔다.
"낮에 화물을 나르다 보면, 먼 지방까지 가야 했어. 그래도 공장 퇴근시간 전에는 무조건 들어와야 했지. 하루 종일 운전하고 오후 7, 8시쯤 퇴근할 수 있었어. 공장에 야간작업이 많을 때는 (직원들 퇴근시키고) 밤 11시나 12시 되어서 집에 도착했지."
당시 부산의 신발공장들은 일손이 부족해도 곧바로 충원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농촌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인력을 모집해 데려왔다. 특히 전라도에서 여직원을 많이 수급했다고 한다.
"그때 통근버스를 몰고 전라도 지역을 무수히 다녔어. 회사 직원들이 미리 그곳에 가서 학교 교장이나 선생님들을 통해 사람들을 구해 놓으면, 우리가 가서 섭외된 사람들을 버스에 태워 오는 거야. 태화고무 회사에서도 우리와 같이 (직원들) 모집하러 가기도 했지. 대체로 토요일 오후에 전라도로 넘어가서 사람들을 데려온 뒤 회사 기숙사에 재웠어. 그리고 일요일 오전에 공장 구경시켜주고 점심 먹여서 다시 전라도로 데려다 줬지. 그 다음에 갈 때는 공장에서 일할 사람들을 태우고 오는거야."
통근버스 기사들은 명절이나 휴일에도 다른 직원처럼 쉬지를 못했다. 직원들을 태워서 고향에 보내주고 명절이 끝나면 다시 데려왔다. 또 회사에서 부서별로 단체 야유회를 가게 가면 통근버스를 몰아야 했다.
"그때 기사 생활을 같이 했던 친구들 중 열 명 정도는 지금도 매월 모임을 하고 있지. 기사 일을 그만둔지 오래 됐는데도 나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하는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났어."
■외딴 섬에서 부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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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부산 신발공장들은 명절 때 직원들의 귀성 차량으로 회사 통근버스를 제공했다. 사진은 1989년 추석 연휴 때 동양고무에서 회사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출발하는 모습(위쪽)과 1980년 2월 부산역에서 설날 귀성표를 구하려고 길게 줄을 선 장면. 국제신문DB |
윤영례 씨는 1958년 전남 진도의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돈을 벌려고 어린 나이에 부산으로 온 그는 영도 청학동의 친구집에 머물면서 태화고무 공장에 취직하게 됐다. 먼저 재봉과에서 속칭 '시다'(보조원) 일을 했다.
"미싱 돌리는 언니 앞에 앉아 있다가, 작업한 거를 내게 주면 실밥 나온 부분을 쪽가위로 잘라내는 거였어. 하지만 미싱 일을 해야지 돈을 더 받는다는 걸 알았지. 그래서 언니들이 자리를 비울 때, 헝겊 쪼가리 갖고 내 혼자서 미싱 연습을 밤낮으로 계속 했지. 그때 반장 언니가 나를 잘 봐준 덕분에 빨리 재봉작업으로 올라갈 수 있었어."
그는 친구집에서 계속 지낼 수 없자 가야동에 하숙집을 구했다. 당시 하숙은 2평 남짓한 방에 5~6명이 함께 지내는 것이었다. 아침 밥상은 주로 김치, 콩나물에 된장국이었다. 하숙집 할머니가 하숙생 12명의 점심 도시락을 다 싸줬다.
"추운 겨울엔 연탄불에 양철찜통으로 물을 끓여 놓으면, 뜨신물 한 바가지에 찬물 섞어서 머리를 감았지. 밍기적거리다 늦게 일어난 사람은 뜨신물이 없어 찬물로 머리를 감아야 했어. 머리 말릴 시간도 없이 수건을 머리에 얹은 채 밥 한 숟가락 먹고 공장으로 뛰어가는 거야."
공장 주위에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외상을 주는 상점들이 널려 있었다. 화장품이나 의류뿐 아니라 튀김집, 호떡집, 국수집 같은 데서도 외상을 해줬다. '재봉과 몇 조에 누구누구' 이런 식으로 장부에 적어 놓았다. 월급날에 하숙비 내고 외상값 갚으면 얼마 남지 않았다.
윤 씨는 명절 때 회사 버스를 타고 목포까지 간 뒤 배를 타고 고향에 갔다. 그런데 태풍주의보가 내리면 목포에서 발이 묶였다. 심한 경우에는 명절 끝날 때까지 배가 뜨지 않아서 결국 고향에 못가고 목포에서 기다리다 회사 버스 타고 돌아왔던 일도 있었다.
■월급 몽땅 고향으로
강경순(61) 씨는 경북 영주 산골에서 6남매의 맏딸로 자랐다. 형편이 어려운 집안의 맏이다 보니, 일찍 돈 벌어서 가계에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열 일곱 살 때 부산에 와서 국제상사 신발공장에 들어갔다.
"그때 고향서 같이 온 친구는 다른 애와 동거하고, 나는 아는 언니랑 함께 (자취방에서) 지내다 공장 기숙사로 들어가게 되었어. 지금의 (사상구) 동양한신2차 아파트 자리가 국제상사 공장이었고, 그 건너편에 기숙사가 있었지. 당시 회사는 객지에서 온 직원들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아서 기숙사에 입소시켰어. 남자 기숙사는 없었고 여자들만 들어갈 수 있었지."
기숙사는 자취방에 비하면 '호텔'급이었다. 한 방에 6명씩 생활했는데, 시설이 괜찮았다.
"개인별로 조그만 옷장이 있었고 세면장, 공동목욕탕도 갖추고 있었어. 일 마치고 기숙사에 들어가면 마음대로 못 나와. 휴일에는 사감 선생님한테 외출증을 끊어야 나갈 수 있고, 정해진 시간까지 꼭 들어와야 했어. 취침 전에는 방마다 인원이 다 맞는지 점호를 했지."
기숙사가 가까이 있어 좋았지만, 작업물량이 많을 때는 '조출'로 오전 7시부터 나가서 일을 했다. '하루에 몇 족(켤레)'으로 생산량이 잡히면 그것을 완료해야 기숙사로 돌아왔다. 컨베이어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나눠서 작업을 하는데 손발이 맞지 않으면 밤 9시까지 남아서 작업한 날도 많았다고 한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손이 퉁퉁 부어서 손가락을 제대로 못 쥘 정도였다.
"명절 때 전라도 쪽 사람들은 회사 버스 나눠 타고 고향에 다녀왔어. 하지만 경북 쪽은 인원이 적어서 버스 1대도 안됐지. 그래서 완행열차를 타고 갔어. 기차표를 사려고 부산역에 가서 길게 줄을 섰어. 그렇게 구한 표도 입석이라, 꽉찬 객실에서 5~6시간 서서 가느라 고생했지."
그는 신발공장에 다닐 때 '통장'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월급 대부분을 고향에 보내줬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돈을 번 덕에 우리 동생들이 다 공부를 잘했어. 지금 대학교수, 공무원, 변호사, 강사를 하고 있고 여동생 남편은 교장 선생님이야. 평소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너를 공부 못 시킨 게 제일 가슴 아프다'고 말하지. 하지만 나는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고 잘 살고 있으니까 괜찮아. 동생들도 다 잘 살고 있으니까."
구술 채록=김정연
글 구성=구시영 선임기자
기획: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