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풀 붙이고 신발창 다듬고…
- 칼에 손 베이거나 다치는 일 많아
- 일 힘들어 입사 일주일만에 사직
- 작업 서로 안 맞아 싸움도 잦아
- 야간작업 빵·국수로 허기 채워
- 구멍가게에 맞장부 만들어 외상
- 월급날 공장 주변 소매치기 기승
- 만삭 여직원, 화장실에서 출산
- 가마 안에서 넘어져 숨지기도
- 휴일엔 영화관람, 그나마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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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의 5대 신발 메이커였던 삼화고무 공장에서 장화를 만들고 있는 직원들. |
■눈물 삼키며 신발 만들어
"처음엔 신발에 풀 붙이고, 빠찌(패치) 붙이는 거 하다가 나중엔 신발창 다듬는 걸 했어. 신발창이 찍혀 나오면, 창 겉부분 여기저기 삐져나온 것들을 칼로 매끈하게 만드는 거야. 작업량이 워낙 많아서, 칼날에 손을 베이거나 다치는 경우가 많았지."
김교주(82) 씨는 신발공장을 다니면서 아이 둘을 혼자 키웠다. 결혼한지 8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남편과 사별한 뒤 오로지 아이들만 보고 살았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끝까지 키우고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특히 초등학교 1학년이던 딸애가 학교 마치고 아무도 없는 집에 가기 싫어서 그의 공장으로 찾아와 있는 게 늘 가슴이 아팠다. 그는 일 마치고 저녁 8시께 집에 와도 편히 쉬지 못했다. 아이들 챙기느라 밤 12시 넘어서야 잠들고 새벽 5시에 일어나 밥을 지어야 했다.
"내가 남편 없이 두 아이 키운다고 세상천지 안해 본 게 없어. 공장 작업에 좀 여유가 있으면 다른 데로 장사하러 가고, 또 고물을 주으러 여기저기 다녔지. 어디서 일이 생기면 그리로 가고, 공장일이 급하면 다시 오고 그랬어."
그는 최근까지도 부산의 작은 신발공장에서 일을 해오다 건강 문제 등으로 지금은 쉬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제까지 신발 만드는 일을 지겹도록 했다. 더는 안했으면 좋겠다. 혼자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느라 가슴 답답한 일이 참 많았는데, 그거 다 말로 못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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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동구 범일동의 국제고무공업사 전경. |
이혜숙(72) 씨는 서른 다섯 살 때 가출해 신발공장에 들어갔다. 가난 속에서도 맨날 술 마시고 빈둥거리는 남편을 보기 싫어서였다. 그를 포함해 25명 정도가 진양고무 공장에 같이 입사했는데 일부는 1주일만에, 또 일부는 한 달만에 그만뒀다. 운동화 끈을 일일이 매고, 냄새가 지독한 기름으로 신발 얼룩을 지우는 등의 작업이 너무 고되서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딸린 아이들을 생각해 꾹 참고 견뎠다.
작업 과정에서 직원끼리 싸움도 잦았다고 한다. 신지숙(가명·75) 씨의 기억이다.
"손발이 안 맞아서 다투고, 먼저 들어온 사람이 후배에게 텃새 부린다고 싸우고. 그래서 내가 작업반장일 때 하루는 따로 불러서 '니들 싸우러 공장에 왔나' 하고 혼내고 그랬어. 늦게 입사한 동생들은 서러워서 울고불고. 고향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데 얼마나 서러웠겠나. 못된 애들은 진짜로 못됐었지. 싸움질 자주 하는 사람은 시말서 써거나 심하면 쫓겨났어."
18살 때 돈을 벌려고 동양고무에 들어간 신 씨는 국제, 진양, 삼화, 보생, 태화, 한성 등 부산의 웬만한 신발공장을 거의 다 다녔다. 공장에서 고무신·작업화 만드는 일, 갑피 안에 풀칠하는 일, 미싱(재봉) 작업 등 온갖 일을 다했다. 큰 화재로 인해 난리를 겪기도 했다.
"(1960년도) 국제고무 공장에 다닐 때 일이야. 작업 중 갑자기 불이 났어. 직원들이 놀래서 한꺼번에 밖으로 뛰어나오려다 계단에서 넘어졌지. 출구를 못 찾고 갇히는 바람에 피해가 더 컸던 거 같아.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하루아침에 없으니까 정말 마음이 아팠어.
■외상, '맞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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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자표' 신발을 생산했던 국제고무의 전시행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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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근무했던 재봉 부서에는 작은 난로가 있었어. 겨울에 직원들이 '양은 도시락'을 그 위에 착착 얹어놨지. 그걸 자주 디비(뒤집어)줘야 하는데, 일 하느라 디빌 시간이 없는기라. 그래서 점심 먹을 때 보면, 난로 밑에 있던 도시락은 타서 눌어있고, 가운데 거는 뜨끈하고 그 위에 거는 미적지근한 거야. 대부분 자취하는 사람들인데 반찬이 뭐 있겠노. 간장에다 고춧가루, 깨소금 같은 걸 넣어서 비벼 먹었지. 형편이 어려워 도시락을 못 가지고 온 사람이 있으면 한 숟가락씩 덜어서 나눠 먹었어."
하순자(70) 씨는 젊은 시절 진양고무 공장에서의 장면을 이렇게 떠올렸다. 야간 잔업을 하면 국수와 빵이 제공됐는데, 자기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먹었다. 국수는 삶은 면에다 멸치국물을 부어 먹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허기진 배를 달래려 한 그릇 후루룩 먹고 다시 일했다.
월급이 적은 시절이라 외상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오늘은 어디 가서 또 외상을 받을까' 하는 걱정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상당수 공장직원들은 동네 구멍가게에 조그만 '맞장부'를 만들어 놓고 필요한 물품을 구했다.
"월급 받으면 외상 갚고, 또 외상 놓고 다시 갚아주고 하는 식이라. 왜 맞장부를 했느냐 하면, 한 쪽에서만 작성하면 나중에 돈을 줬니 안줬니 싸움 나니까. 그때그때 장부에 함께 적고 외상 갚으면 그 자리에서 같이 지우고 그랬어. 그래도 돈 떼먹고 사라진 사람 많았지."
월급날에는 신발공장 주변에 소매치기가 기승을 부렸다. 피해가 종종 발생하자 도시락 안에 월급봉투를 넣어 퇴근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공장에는 제대로 된 탈의실이 없었다. 한 쪽 구석에다 칸막이를 세워놓고 그곳에서 옷을 갈아 입었다.
"한창 멋 부리고 예쁠 나이였지. 어떤 애는 뾰족구두에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다니기도 했어. 나는 원피스 한 벌을 큰 마음 먹고 산 적이 있어. 월급보다 많은 6만 원쯤 주고. 그걸 처음 입고 출근하니 모두들 부러워했지. 그런데 야간 작업하고 아침에 퇴근하려는데 원피스가 없는거야. 구겨지지 말라고 옷걸이에 걸어서 보자리로 덮어놨는데…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집에 가서 펑펑 울었어."
다음 날 작업반장이 '그 옷 갖고 간 사람 자수해라, 자수하면 신발 한 켤레 준다'고 했지만 옷값이 더 비싼데 자수할 리 없었다. 그 외에도 물품 도난사고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직원들이 퇴근할 때 소지품을 검사하기도 했다. 혹시 신발 등을 숨겨 나갈까봐 그랬다고 한다.
■안타깝고 슬픈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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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화고무가 생산했던 '말표' 어린이 고무신. |
공장에서 가슴 아픈 일도 많았다. 어느 여직원이 만삭의 몸에도 불구하고 돈을 더 벌기 위해 공장에 계속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출근해 화장실에 갔다가 그만 아이를 낳았다. 회사 간부와 직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과 담요, 광목, 쌀 등을 가지고 그 여성 집을 수소문해 찾아갔는데, 집이 너무 못 살아서 모두를 안타깝게 했다고 한다. 또 공장의 신발을 찌는 가마 안에서 남자 직원이 넘어졌는데, 가마 문이 닫히는 바람에 숨지고 말았다.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직원의 아내가 임신 중이라는 얘기가 전해지면서 주위를 더욱 슬프게 했다.
상당수 직원들은 공장이 쉬는 날 남포동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주말에 창극을 보러 가는 여직원들도 더러 많았다. 당시 삼일극장에서는 '임춘앵과 그 일행'의 공연이 인기를 끌었다.
또 남인수, 이미자, 남진, 나훈아, 하춘화 같은 유명가수들의 '리사이틀'을 관람하며 고단한 삶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풀었다.
구술 채록=김정연
글 구성=구시영 선임기자
기획: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