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래부·부산첨사 장교 엄격 통제
- 인삼·중국 견직물·일본 銀 거래
- 채소·어류 거래 아침시장도 번창
부산항은 국내 최대 해상관문이자 유서 깊은 무역항이다. 되돌아보면 조선시대 바다를 통제하던 해금정책을 펼치면서도 유일하게 해상무역을 위해 열려있던 공간이 부산이었다. 용두산 주변 10만여 평에 자리한 일본상관인 초량왜관이 바로 그곳이었다. 하지만 조선과 일본 간 교역을 하는 과정에서 밀무역과 함께 교간, 도난 등 잡다한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다 보니 조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더욱이 이곳엔 대마도에서 건너온 건장한 사내 500여 명이 거주해 항상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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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말 일본인이 채색으로 그린 부산 초량왜관도. |
초량왜관에 들어가려면 2개의 관문(설문(設門)·수문(守門))을 거쳐야만 했다. 첫 문인 설문은 왜인이 거주하는 왜관과 조선인 마을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의 동구 초량의 차이나타운 부근이다. 이곳에는 동래부 장교 1명과 군졸 1명, 그리고 일어통사 1명이 10일 교대로 근무하면서 동래부사가 발급한 통행증을 확인하며 출입자를 통제했다. 이곳을 통과하면 초량왜관의 실질적인 출입문인 수문에 도달한다. 여기서도 동래부와 부산첨사영에서 나온 장교 1명씩과 일어통사 2명, 문지기 2명이 오전 6시~오후 6시 근무했다. 역시 출입증 없이는 드나들 수 없는 마지막 국경게이트와 같은 곳이었다. 오늘날 중구 동광동의 부산호텔 부근이다.
흥미로운 점은 수문을 중심으로 반경 50m 이내에서 왜관무역과 아침시장이 열렸다는 것이다. 왜관 내 개시대청(開市大廳)에서는 공식적인 중계무역이 매달 6회에 걸쳐 이뤄지고, 수문 앞마당에서는 주민들의 채소와 수산물이 아침에 일본인을 상대로 거래됐다. 초량왜관에서의 중계무역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조선 인삼, 중국 견직물, 일본 은(銀)은 당시 각 나라의 대표 무역상품이었다. 특히 중국에서 조선무역상이 갖고 온 백사와 견직물이 이곳을 거쳐 일본 최대의 견직물 산업지대인 교토로 흘러들어가 기모노에 화려한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됐다. 그러니까 교토는 '은의 길(Silver Road)'의 출발점인 동시에 '비단길(Silk Road)'의 종착지였던 셈이다. 동시에 초량왜관의 수문은 이러한 두 갈래 길목을 지키는 관문역할을 하면서 17세기 중반부터 100년에 걸쳐 가장 빛나는 무역전성기를 누렸다.
미국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는 아치형의 웅장한 조형물이 단연 눈길을 붙잡는다. 19세기 중반 서부개척시대 때 서부로 향하는 대표적 관문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징성을 담아 1965년에 세운 조형물이 게이트웨이 아치(Gateway Arch)로서 게이트웨이 시티(Gateway City)라는 별칭과 조화를 이룬다.
부산항은 예부터 우리나라의 무역입국을 위해 최선을 다해온 해상물류의 산업현장이다. 앞으로 동북아 물류의 거점 항만답게 더욱 역동적인 꿈을 펼쳐나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부산판 '게이트웨이 아치'라도 하나 세워보면 어떨까. 오래전 일본과 중국 간의 가교역할을 한 왜관무역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국내 무역항 일번지로서의 정체성을 다져나가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끝 -
부산세관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