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천동 산 333번지 일대
- 금강공원 내 금어사 들어서면
- 절 사방이 차나무로 파릇파릇
- 부산 앞바다의 해풍·토양 등
- 재배조건과 딱 맞아떨어져
- 양은순 시인, 매년 문화제 개최
- 올해 전설 속 다신제도 열어
품격이 높다. 관조의 경지에서 맛을 음미한다. 더구나 세속에 찌든 얼룩을 씻어주고 건강에도 좋으니 신선 놀음이 따로 없다. 바로 차문화다. 그 깊고 오묘한 차맛을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을까.
햇차를 정성스레 우리던/ 부드러운 손길/ 햇차를 함께 마시던 시간이 그리워/ 가슴이 아려오는 하루/ 홀로 비를 보며/차를 마시니/ 차향 속에 어머니의 내음이/ 코 끝에 젖어온다(양은순의 시 '사월의 햇차' 중)
우리나라에 차가 들어온 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신라 흥덕왕 3년(서기 828년) 신라 사신 대렴이 당나라에서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는 설과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서기 48년)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그것이다.
#금정산 차나무 군락지
차밭하면 끝없이 펼쳐진 보성이나 제주를 떠올리는 게 당연지사. 하지만 부산에도 금정산을 중심으로 광활한 차나무 군락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오래전엔 찻골이라 해서 북구 만덕동에서 온천장, 남산동을 거쳐 양산에 이르는 거대한 군락지를 이뤘다고 한다. 하지만 도시 개발이 급속도로 이뤄지면서 이제 차나무를 찾아보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실망할 단계는 아니다. 군락지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동래 차밭골이다. 차밭골은 어디에 있을까. '동래부지'는 금강공원 안 독진대아문(동래부 동헌 바깥대문으로 일제때 금강공원으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동헌으로 이전 복구됐음) 왼쪽 '말바우(馬岩)' 아래 계곡 일대라 적고 있다. 또한 1993년 발간된 동래구청 발간 '동래향토지'에는 '금강공원 아래 온천동 산 333번지 일대를 차밭골이라 하며, 이 지역에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두 사료가 적시한 차밭골은 위치가 정확히 같다.
고 최해군 선생도 금정산 동쪽 능선이 남으로 뻗어내려오다 금강공원 위쪽에서 두 골짜기로 갈라지는데 (온천동)서쪽으로 내리는 골짜기와 그 아래 지역이 차밭골로 불렸다고 설명했다. 차밭골에서 차나무 군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온천동 산 333번지 일대. 바로 금어사가 있는 지역으로 절집을 둘러싼 골짜기가 무척이나 아늑하다.
#금어사에 흐르는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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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공원 차밭골에서 양은순 시인이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
이제 타임머신을 타고 아득한 옛날로 돌아가 보자. 차밭골 전설은 은혜 갚는 차나무신 이야기로 짜여져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옛날 옛날 한옛날에, 산저라 불리는 노인부부가 성내 마을에 살고 있었다.(산저라는 이름은 과거 말바우 또는 마암, 그리고 산저리라는 옛 지명에서 나왔다고 보면 되겠다) 한 해 눈에 많이 내려 금정산 일대에서 땔감을 구할 수 없어 마을 사람들이 의논 끝에 골짜기에 있는 작설나무를 베기로 결정했다. 차약이 되는 나무를 자르면 안 된다며 산저노인이 막았지만 도무지 말을 듣지 않자 노인은 자기집 행랑채를 땔감으로 내줬다. 덕분에 작설나무는 목숨을 보존했고. 이듬해 봄 농사철이 되었는데 가난한 산저노인에게 머슴이 되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실망한 노인이 샘에서 목을 축이려는데 홀연히 한 젊은이가 나타나 스스로 머슴이 되기를 자청하며 큰 절을 올리지 않는가. 횡재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행랑채가 없어 머슴 잘 곳이 없어 고민을 하자 청년은 부엌에서 자도 된다며 개의치 않았다. 이후 머슴은 땔나무를 하고 작설차를 장날에 파는 등 열심히 일해 많은 돈을 벌게 해주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농사는 대풍이요, 마을엔 경사가 그칠 새가 없었다. 어느 날 머슴이 산저노인에게 큰 절을 올리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저는 할아버지 때문에 살아남은 작설나무의 신입니다. 저는 새경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갚기 위해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작설나무신 이야기는 순식간에 동래 관가에 퍼졌고, 작설나무는 '신령나무'로 불리며 주민들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떠받들며 다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차밭골은 옛 마암마을(산저리)을 이르는 명칭인데, '말바우골'이라고도 했다. 아기를 못낳는 여자가 말바우(위)에 걸터앉으면 아기가 생긴다는 전설도 전해져 온다.
전설의 고향인 온천동 산 333번지 금어사는 금강공원 내에 있다. 금강공원 하면 나이 지긋한 분들이라면 향수가 가득 어린 부산의 쉼터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동물원과 식물원 생각과 신기했던 놀이기구와 케이블카를 타러 부모 손잡고 놀러갔던 추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나.
금강공원 정문을 지나 왼쪽 길로 들어선다. 따가운 햇볕을 가려주는 도심 숲을 걷으니 흥이 절로 난다. 아스팔트로 덮인 길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이주홍 문학비를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시민체육공원이 보이고 바로 옆에 금어사 입구가 나타난다. 절에 들어서면 차나무들이 사방을 둘러싼다. 파릇파릇한 차나무 잎들이 녹색 선경을 이룬다. 대웅전 앞에 이곳이 동래 차밭골 본산임을 알리는 기념비(東萊茶田)가 서있다. 절 뒤편에 말바우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으니 차밭골 신화와 역사의 현장임을 누군들 모르겠나. 족히 수만 그루는 될 듯한 차나무 군락지를 둘러보노라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비록 보성다원처럼 광활한 차밭 풍경은 아닐지라도 아기자기하고 은밀한 기운이 골짜기를 온통 감싼다.
금어사 주인인 양은순 시인과 함께 차밭골 골짜기를 오르는데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사질양토라서 그런지 미끄러지기 십상이기 때문. 그만큼 물이 잘 빠지는 한편으로 보수력도 있어야 하고, 반음반양지의 까다로운 환경조건을 갖춰야 차나무가 잘 자란다. 차밭골이야말로 부산 앞바다의 해풍이 불어닥치고, 골짜기에 어리는 안개, 토양과 물줄기 등이 조건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 금어사 지역이 왜 차밭골이란 명칭을 얻게 됐는지를 알만하다.
#고 최해군 선생의 회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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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구 온천동 금강공원 안에 있는 금어사(金魚寺)와 차밭골 표석. |
차밭골의 차나무 군락은 야생 차밭인지, 아니면 심고 가꾼 차밭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고 최해군 선생의 회고담 한토막. '내가 부산원예고등학교(현재 부산전자고등학교) 사택에 산 것은 1956년부터 1975년까지 20년 간이다. 사택 위 산기슭은 일본인 농장주가 계단식으로 개간하여 매화나무 과수원을 조성했더랬다. 하지만 1960년 즈음 매화나무들이 거의 뽑혔고 계단도 무너져 산비탈의 학교 뒷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비탈면에 몇 그루의 차나무가 있길래 두 그루를 뽑아 사택 뜰에 옮겨 심었다. 그 차나무들은 낮은 키의 소엽종으로 뿌리가 굵었고 고목이나 다름없었다. 이들 차나무는 집이 새로 들어설 때 없어졌지만 고목임을 감안할 때 원래 차밭골에 자생했던 차나무 후손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문가들은 차밭골 차나무가 대략 중국종의 잡종 내지 변종으로 보고 있으나 군락에 대한 종합적이고도 면밀한 생태학적 연구가 이뤄져야겠다.
고 최 선생은 차밭골과 온천의 관계를 유추하기도 했다. 물론 기록에 남아있거나 정설은 아니다. 그는 신라시대부터 유명했던 온천장에 고관대작들의 왕래가 잦았을 것이며, 기호품인 차의 재배가 온천과 밀접하게 연관되었을 수도 있다고 봤다. 조선조 동국여지승람에 온정 가까이 온정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자리가 차밭골 근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차문화가 발달하려면 세가지 요소가 반드시 갖춰져야 한다. 차밭과 차샘, 그리고 차인이다. 차밭골에는 멋진 차샘이 있다. 금어사 대웅전 뒤 용왕당에 있는 거북샘과 학샘에서는 사시사철 가뭄과 장마에 관계없이 같은 수맥에서 일정량의 맑고 찬 샘물(석간수)이 솟아난다. 그 맛이 천하일품이라 일품천으로도 불린다.
약수샘물에 담긴 설화를 금어사 주지 월강 스님이 들려준다. 한 신도가 사업 성취를 위해 기도를 드리던 중 마지막 날 꿈에 백발 할아버지가 나타나 막대기를 주면서 석벽을 찌르도록 하기에 그대로 했더니 물이 펑펑 솟더라는 것이다. 신도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호미와 괭이로 종일 석벽을 팠더니 물구멍도 없이 표면에서 아주 맑은 물이 흘러나왔고, 그 향취가 약냄새로 진동하니 그곳에 샘을 만들어 약수정이라 하였다. 금어사가 처음 들어선 때가 1908년, 중창된 1925년부터 말바우절이라 불린 것을 볼 때 차샘 역사는 1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까 짐작된다.
#양은순 시인의 차 사랑
학샘과 거북샘은 물맛 좋기로 소문나 지금도 수많은 주민들이 찾고 있다. 그리고 차인은 바로 금어사 주인인 양은순 시인이다. 부산을 대표하는 차시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도에 조예를 지녔다. 더구나 차밭골(금어사)의 주인이니 더 말해 뭣하랴. 2005년 5월 동래차밭골 동인회를 발족해 지금까지 이끌어오고 있으니 그의 지극한 차 사랑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차밭골은 신화와 역사를 간직한 부산 차문화 발상지입니다. 일본에 계셨던 조부께서 해방이 되자 금어사를 사들인 이후 3대째 소중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저도 자연스럽게 차인의 길을 걷게 됐죠. 차밭골 이야기는 들었지만 위치는 잘 몰랐는데 온천동 산 333번지라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죠. 눈에 익은 주소라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니 제가 있는 금어사가 바로 차밭골이었던 거예요. 얼마나 놀랐던지. 그래서 차에 대해 파고들자고 마음 먹었어요. 금어사에는 차를 사랑했던 많은 분들이 오셨더랬습니다. 한국화 최후의 거장인 의제 허백련(1891~1977) 선생이 돌아가시기 7년 전 6개월간 머무시기도 했었고, 이름난 분들이 함께하는 차회가 자주 열렸죠. 저도 이런 인연으로 30년 넘게 차 연구와 강의는 물론, 시 창작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제게 차와 시, 그리고 불교의 해탈은 같게 느껴집니다. 다도와 차시 창작은 수행의 한 방편인 셈이죠."
양 시인은 1995년부터 매년 동래차밭골문화제를 금어사에서 연다. 전설속 다신제에 착안해 무속인들이 말바우 주변에서 봄 가을에 제를 지냈으나 박정희 정권때 종교 정화차원에서 끊겼던 것을 새롭게 되살린 것이다. 2016년 6월 18일 제22회 다신제가 성황리에 열렸다. 이번 행사에는 광주지역 문인 40여 명이 참석해 영호남 차문화 교류라는 뜻깊은 성과를 얻었다.
행사는 주로 매년 6월에 열리는데 차밭골에서 차를 따는 시기가 곡우 이후 5월말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문화제 순서를 보면 본전에 향과 차, 꽃 등 여섯가지 공양물을 올리는 육법공양에 이어 생활 선다례 시연, 그리고 차밭골 백일장 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격의 없이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차회와 시화전 등이 함께 열린다.
차밭골산 차를 양 시인은 금어차라 부르지만 생산량이 많지 않아 판매는 하지 않는다. 차맛을 보려면 대웅전 옆 차실을 방문하는 수밖에 없다. 양 시인을 따라 들어가 석간수로 우려낸 금어차를 맛봤다. 은은한 풍미가 감칠 맛을 낸다. 떫은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살아있는 차맛이 입안을 감돈다. 은은하고도 달디단 여운이 남는다. 뛰어난 맛이다! 도심 삶에 찌든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느낌? 우리나라 명차 대열에 올린다 해도 하등 문제가 없을 듯하다.
쇄락한 금강공원을 다시 일으킬 원동력이 바로 차밭골이 아닐까. 아래쪽 온천장이 부활의 날갯짓을 하듯, 차밭골을 제대로 스토리텔링화하고, 상품화한다면 그 꿈도 머지 않아 이뤄질 것이라 확신한다.
최원열 전 국제신문 논설위원
공동기획: 부산동래구청,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온천장 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