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0년 21세로 현해탄 건너와
- 땅투기 낙동강변·전라도까지 뻗쳐
- 러시아서 매입시도한 땅 가로채 훈장
- 박간성이란 10만평 거대한 별장 짓고
- 일본어판 신문에 조선어판 발행 제안
- 조선인 종업원 채용하고 교유관계
- 일본인 온천장·금정산 개발 바람 타고
- 동래별장 짓자 권력자들 문전성시
- 그곳은 해방 후 부산 경제·역사 산증인
- 죽어서도 부산 안떠나…아미동에 무덤
#전설같은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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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이재민 기자 |
습기 가득한 장마가 잠깐 비켜간 맑은 아침에 동래구 온천동 동래별장 앞에 섰다. 역사와 규모에 비하면 다소 소박한 대문과 머리맡에 동래별장이라 써 붙인 현판이 주변과 차이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대문 좌우로 금정산 자연석을 이용해 만든 긴 담장은 이 건물이 결코 소박할 수 없는, 그래서 마당 안으로 유인하는 알 수 없는 힘이 방문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이런 느낌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음식점 안내 글귀들에서 시대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동래별장의 기능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한정식과 야외 결혼식, 각종 모임 공간으로 변해 있다. 그렇지만 영 어색해 보이지도 않는다. 이야기 있는 장소에서 입맛 돋우는 음식이라 조화로울 수도 있겠다 싶다.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들고 동래별장의 속살을 하나 둘 듣기 시작했다.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한 그 시대 장·차관 등 권력자들, 내노라 하는 돈쟁이들이면 부산에서 빠지지 않는 코스라는 이야기, 키보다 높은 담장 밖으로 흘러나오는 노래 가락이며, 춤꾼들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부산에도 유명한 노래꾼과 춤꾼들이 많았지만, 전라도에서도 여기까지 와 공연을 했다고 한다. 은행 지점장을 지내며 거래처에서 베푸는 접대를 받았다는 어느 아저씨는 기생과 얽힌 이야기를 영웅담처럼 늘어 놓는다. 기생이 수십 명 있었다는 사람, 수백 명 있었다는 사람, 제각각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달라도 동래별장의 전성기를 이해하는데 별 문제는 없어 보인다.
#돈과 권력이 지은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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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자마와 그의 가족. |
대문 틈새로 모습을 드러낸 별장 건물에 관심을 가진 척 하면서 마당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에 깔려 있는 잔디, 여기저기 서 있는 일본식 석등, 무엇보다 도심 속 울창한 정원수들은 과거 일본인 부자가 만들었던 이 별장 건물의 품위를 한껏 올려놓는다.
별장의 외형은 거의 손을 댄 흔적이 없다. 지붕에 얹혀있는 기와에 난 풀이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외관에 보이는 일본식 유리창이며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는 외관의 모습이 '돈과 권력이 없으면 지을 수 없는 건물이구나' 하는 느낌을 안겨준다.
건물 외관을 더 보기 위해 건물을 따라 뒤로 돌아가 보았다. 야외 결혼식이 열리는 넓은 마당은 기억에 날 추억을 만들어 주기에 충분해 보이는 분위기다. 옆에 붙어 있는 일본식 정원은 금정산 자연석을 대충 다음어 올려 놓았다. 돌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들어서면 미로가 이어진다. 그다지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같은 분위기다. 카메라에는 담기 어려울 정도로 자란 소나무며, 단풍나무, 향나무 등은 별장의 시간을 잘 알려준다. 최근에 지었을 건물들은 별장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 있는 나무들을 비켜가며 지었다. 여기저기 오솔길에 난 돌길이며, 정원용으로 어울린 우리의 전통적인 탑도 어디 출신인지 알수 없지만 놓여져 있다.
실내는 식당으로 탈바꿈해 옛 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돌탕(石蕩)을 보면 순간 백여 년 전 목욕문화를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지금은 온천수를 끊어놨으나 얼마 전까지 돌 구멍 사이로 유입된 온천물에 목욕을 할 수 있었다. 별장 안에는 타일 탕도 2개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부산은 대박과 쪽박이 교차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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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별장 내 돌탕. |
1876년 개항과 함께 기회의 땅 부산으로 건너온 일본인에게 부산은 대박과 쪽박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큰 돈을 벌어 부산의 지배자로 성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망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도 많았다. 일본인들은 주로 무역이나 상업에서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일본인 거류지 주변이나 초량, 영도 등 돈이 될만한 곳에 땅투기를 하였다. 그 바람에 조선인들의 부동산은 일본인에게 넘어갔다. 조선인들은 집이나 토지를 담보로 일본인 전당포에서 돈을 빌려 일본에서 수입된 진기한 물건을 소비하는데 다 써버렸다. 물론 조선인 가운데 일본인들과 거래하면서 큰 돈을 번 사람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인 부자가 있다고 해도 그 수는 일본인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부산에서 거부가 된 일본인들 가운데는 본토의 재벌 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는 자들이 많았다. 식민지 지배자로서 그들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이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이다. 그는 일본 와카야마현(和歌山縣) 출신으로 오사카의 이호이상점 점원으로 상업에 뛰어들어 1880년 이 회사의 지점장으로 부산에 왔다. 그의 나이 21살이었다.
하자마는 본업이었던 무역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땅투기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부산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낙동강변, 전라도까지 확대되었다. 그의 능력이 일본 정부에도 알려져 마산에 러시아가 매입하려던 땅을 가로채는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기도 했다. 1898년에 있었던 소위 마산포 사건이다.
그의 땅투기 덕분에 땅을 뺏긴 조선인들은 돼지우리 같은 집에서 세를 내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는 부산터널 위에 박간성(迫間城)으로 불리는 별장을 짓고 살았다. 10만여 평의 규모였다. 당시 부산에서 일본인 가운데 가장 어른이었던 후쿠다(福田增兵衛)는 그의 별장을 보고 조상들이 덕을 쌓아서 그렇다고 치켜세웠다. 그의 행보에서 조선과 조선인을 지배하는 식민자의 냉혹함이 보인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유치환 서정주 전형필이 피란생활을 했지만 화재로 소실되었다.
하자마는 부산의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서 폭넓은 활동을 했다. 어찌보면 식민지시대 부산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어 부산에 묻힌 하자마
한편 하자마는 일본인이면서 부산이라는 공간에서 생활한 부산 사람이었다. 조선인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일본인들에게 조선인에 대한 신용을 강조했다. 각종 사회시설이나 경제시설을 제공하여 조선인들의 삶을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어판 신문에 조선어판을 함께 발행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조선인을 그의 종업원으로 채용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조선인 지도자들과 활발한 교유관계도 맺었다.
물론 그의 부산 사람으로서의 행보에는 일본인의 조선인 지배를 전제로 하였다. 1942년 8월 23일 요양 차 머물렀던 일본의 시즈오카에서 사망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부산으로 와서 장례를 치르고, 아미동 묘지에 묻혔다. 부산부에서 장례를 치를 정도로 하자마는 당시 일본인들에게 중요한 사람이었다. 20년을 살았던 일본보다 60년을 살았던 부산이 그의 삶터였던 셈이다. 이 시대 많은 일본인들처럼 하자마에게 부산은 영원히 조선을 지배하는 일본의 한 부분이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도망하다시피 일본으로 돌아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개항 후 일본인들은 온천개발에 관심을 가졌다. 부산의 일본인 자치기구는 1883년 동래부사로부터 목욕탕 일부를 빌려 관리하다가, 1898년 일본 영사관이 한국정부와 협상하면서 일본인들이 온천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부산에 와서 돈을 번 일본인들은 이곳에 투자하였다. 오이케(大池忠助), 하자마(迫間房太郞), 토요다(豊田福太郞), 타카세(高瀨政太郞)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때 부산의 유명 숙박업자들의 여관이 온천장에 등장하였다. 오늘날 허심청 자리에 있던 봉래관(蓬萊館)은 연못을 만들어 배를 띄우고, 자기들 상표의 과자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전차표와 목욕비를 묶어서 파는 오늘날 말로 하면 패키지 상품도 판매하였다. 유명 부자들의 별장도 여기저기 들어섰다. 최근 사라졌지만 금강원을 만들었던 히가시 바라(東源嘉次郞)의 별장을 비롯해 하자마가 만든 동래별장까지 온천장은 그야말로 돈많은 일본인들의 휴양지였다. 이들은 부산에서 돈을 벌어 온천장에서 여유를 부리며 썼다.
온천장에 투자했던 일본인들은 온천장을 금정산과 묶어 관광지로 개발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인들은 금정산의 바위를 금강산과 비교하곤 하였다. 일부러 정원학자를 불러 강원도 금강산 암석과 금정산 암석이 동일하고 그 모습도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아 내기도 하였다. '금강원'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나왔다.
일본인들은 온천장 개발을 위해 부산과 교통편을 연결하였다. 주로 개인 인력거에 의존했던 일본인들은 1909년 부산-동래간에 경편철도를 운행하였다. 1915년에는 전차를 개통하여 부산과 온천장을 약 30, 40분 거리로 단축시켰다. 온천은 일본인만의 문화가 아니었다. 조선인들도 대중 목욕탕에서 발가벗고 목욕을 즐겼다. 온천장으로 향하는 전차는 늘 만원이었다.
#동래별장 역사는 곧 온천장의 역사
당시의 한 신문을 보면 하자마의 동래별장은 1910년 무렵 만들어져 있었다. 하자마는 1929년 10만원을 투자해 기존 별장 옆에 새 별장을 만들었다. 이 신축 별장에는 하자마 소유의 별도 온천탕원, 즉 온천지하수가 있었다. 이 무렵 대부분 행정기관에서 관리하는 온천물을 배급받아 사용했으나, 유명여관이나 부자의 별장은 별도의 온천탕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때 별장 분위기를 보면 정원에 많은 소나무를 심었고, 주변의 풍부한 돌로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정원에 남아있는 소나무들이 이 무렵에 이식된 것으로 보인다.
하자마는 1929년 8월 9일 좋은 날을 잡아 새 별장에 이사하였다. 별장에서는 각종 모임들이 열리기도 하였다. 당시 하자마 별장을 기사로 다룬 언론에서는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많아 현관 밖에서 응접실까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자마의 권력과 재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동래별장을 소유한 하자마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일본 황태자의 체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역 언론에서는 하자마의 동래별장에 1929년과 1935년에는 황태자가 머물렀다고 큼직하게 기사화 하였다. 부산은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항상 일본의 유명인들이 자주 왕래했다. 부산 부자들의 별장이나 여관은 항상 정치적인 관계가 만들어지는 공간이었다.
동래별장은 해방 후 미군정기에는 미군 휴양소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때에는 부통령 관저로 활용되었다. 이진호 씨가 동래별장과 함께 이웃한 여관들을 함께 불하받았다. 동래관, 뒤에 스파쇼핑으로 바뀌는 뉴관광호텔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 1965년 3월부터 요정으로 용도 변경된 후 10여 차례의 휴업과 폐업을 거듭하다가 2000년 10월부터 대중음식점으로 이용되고 있다. 온천장과 부산 사람들에게 동래별장은 대부분 요정으로 기억되어 있다. 위에서 높으신 어른들이 오는 날에는 주변에 보안요원들이 깔렸다. 동래별장 이웃에게 어찌보면 이곳은 자신들과는 거리가 먼 다른 나라 사람들의 문화로 가득한 곳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 시절 전성기였던 어느 어르신은 지금과 대비되는 당시 자신의 역할을 이곳 동래별장에서 대접받았던 기억으로 자랑하기도 한다.
1970, 80년대 동래별장이 한창 잘나갈 때 부산의 경제 또한 그러했다. 1990년대 이후 쇠락의 길을 걸을 때 부산 경제는 끝없이 추락했다. 그렇게 동래별장의 역사는 온천장과 부산의 역사와도 맥을 같이 하였다.
차철욱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교수
공동기획: 부산동래구청,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