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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대기자의 人香萬里(인향만리) <2-2> 지역 정신을 세운 사람들- 부산대 초대총장 윤인구(下)

권력과 자본에 짓눌린 대학 '윤인구 교육사상' 되돌아볼 때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6-03-20 19:38:25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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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2월 부산대 장전캠퍼스 기공식에서 윤인구(오른쪽) 초대총장이 위트컴 미군 부산군수기지사령관과 악수하고 있다. 위트컴 장군은 부산대 부지 확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 해방 후 십시일반 종잣돈 마련
- 민간 의지로 국내 첫 국립대 설립

- 구포 명문가서 출생, 일찍 유학
- 일본·미국·영국서 근대교육 체험
- 사후 유고집에 그의 발자취 담겨

- 학내외 시련 겪는 지금의 부산대
- 건학정신 통해 난제 풀 수도

#가물거리는 문창성

'옛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에는 빛나는 우물이 이 산에 있어/ 하늘 고기들이 논다 하더니 오늘을 두고서 이름이던가/ 고요한 새벽벌에 먼동이 틀 때 바위에 터 닦고 나무를 심고/ 길 열어 앞날을 기다리더니 문창성도 이제는 부럽지 않아…'.

윤인구 부산대 초대총장이 지은 시에 부산대 황의종(한국음악학과) 교수가 곡을 붙인 '효원의 꿈'이란 노래다. 굿거리 가락에 설화적이면서 서정적인 가사가 인상적이다. 새벽벌, 먼동, 문창성(文昌星) 같은 단어는 교육가 윤인구가 꾸었던 꿈의 내용이다. 문창성은 신라의 대문호 최치원의 시호인 문장후와 북두칠성(일명 문창성)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그가 추구했던 진리 탐구와 자유 추구, 이를 완성하는 봉사정신이 깃들어 있다. 부산대에 문창대(文昌臺), 문창회관이 있는 건 이런 연유다.

윤인구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금정구 장전동의 돌산을 일구어 국가 교육대계의 주춧돌을 놓았다. 그런데 그가 꾸었던 꿈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가 부른 '효원의 꿈'이란 노래는 누가 기억하는가. 이 노래를 사장시켜온 것은 부산대의 비극 아닌 비극이다. 그건 곧 꿈을 사장시킨 것과 같기 때문이다.


#최초의 민립·국립대학 설립

금정산 자락에 들어선 1950년대 말의 부산대 전경.
부산대 탄생 과정을 짚어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엄연히 '국립'으로 출발했음에도 나라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해방 후 경상남도 학무과장이 된 윤인구는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부산에 흩어져 있던 몇몇 기성회를 통합해 대학 설립을 시도했다. 그가 기성회에서 마련한 자금은 당시 돈으로 160만 원. 윤인구는 도청을 설득해 도청 내에 있던 일본인 단체의 사무실 등을 처분해 400만 원을 확보했다. 이때 6·25 당시 해인사 주지를 지내기도 했던 효당 최범술이 중심이 된 불교단체로부터 전답 2만여 평을 기증받은 것이 결정적 힘이 됐다. 이 땅을 조흥은행에 팔아 500만 원을 마련했다. 이렇게 확보한 1000만 원이 부산대 설립의 종잣돈이었다. 윤인구는 이를 문교부에 납부하고 1946년 5월 15일 부산대 설립 인가를 받는다. 당시 '국립'의 개념조차 없는 상황에서 민간에서 뜻을 모아 '국립'의 길을 처음 연 것이다.

당시 1도 1국립대 원칙이 적용되던 상황에서 대학이름을 왜 부산대학이라 했을까. 윤인구의 제자인 정권섭(부산대 56학번) 전 동서대총장은 "윤 초대총장은 전후의 폐허 속에서도 부산의 발전 가능성과 잠재력을 높이 보고 '부산대학'이란 이름을 고수했다"고 전했다.

학무과장 부임 후 윤인구는 부산대 설립 작업과 별개로 약 1200명의 교사와 350명의 교유(敎諭·자격있는 교원)를 충원했다. 일제 강점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민족정신을 되찾는 교육과 계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는 것이었다.

'죽음의 쇠사슬이 풀리고 자유의 종소리 울린 날/ 삼천만 가슴엔 눈물이 샘솟고/ 삼천리 강산에 새봄이 오던 날/ 아, 동무여 그날을 잊어라…'로 시작되는 윤인구 작사, 금수현 작곡의 '8월 15일' 노래는 당시 빅 히트곡이었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 종교가를 꿈 꾼 청년은 어느덧 교육가, 교육행정가, 교육경영가로 변신해 있었다.


#가문의 영광

윤인구(가운데)의 가족. 왼쪽이 아버지 윤상은, 오른쪽이 동생 윤연숙.
윤인구는 1903년 경남 동래부 구포에서 났다. 그의 자전 글에는 옛집의 정취가 이렇게 묘사돼 있다. '구포는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나룻배들이 항상 대던 곳이었다. 강물은 늘 푸르렀다. 나의 옛집은 동래에서 이사 온 조부모님이 정착한 곳으로 목조 싸리지붕의 고가였다. 안채 사랑채 아랫채가 있었고 행랑에는 일하는 사람이 사는 방이 따로 있었다….'

윤인구는 명문가의 자손이었다. 그의 부친 윤상은(1887~1984)은 은행경영가, 행정관료, 교육가 등 여러 분야에서 근대를 개척하고 경영했던 부산의 대표적 선각자다. 윤상은은 1907년 사립 구포구명학교를 세웠고 이듬해 지방 금융기관의 효시인 구포은행을 설립했다. 윤인구의 외할아버지는 부산 최초의 근대학교인 개성학교(부산상업학교의 전신)를 세우고 1898년 한국 민간철도회사를 만들어 철도왕이란 별명을 얻은 박기종(1839~1907)이다. 이러한 집안 내력 때문에 윤인구는 일찍이 일본과 구미에서 수학하며 근대 문명에 눈을 뜰 수 있었다.

3·1 만세운동이 터졌을 때 윤인구는 동래고보 학생이었다. 안대영 동래고역사관 관장은 "윤인구의 가계는 민족계몽, 민족운동을 해온 집안"이라며 "3·1 운동 당시 윤인구는 동래장터에서 선언서 50통을 구해 만덕고개를 넘어 구포에 퍼뜨리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리움을 담은 유고집

1926년 윤인구는 보다 큰 배움을 위해 일본 명치학원 신학부를 들어갔고, 3년 뒤 미국 프린스턴대 신학대학원 수학을 거쳐, 1930년 영국 에딘버러 대학원에 들어간다. 서구 문명과 근대 교육을 체험한 윤인구는 유럽과 시베리아를 한바퀴 돌아 귀국한다. 경성으로 귀국할 때 역전에 마중나온 여자가 있었다. 그의 약혼녀 방덕수였다.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23년 여름 부산 초량교회에서 만나 사랑을 키워 아내가 된 여자다.

1986년 윤인구가 세상을 떠난 후, 방덕수 여사는 남편의 육필 원고와 회고담 등을 모아 '윤인구 박사 그 참다운 삶과 정신'이란 유고집을 펴냈다. 책 갈피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뚝뚝 묻어난다. 책머리에는 이런 글이 적혔다. '…당신은 참되고 의롭게 사시다가 이승을 떠났기에 언제나 생활이 청렴결백했고 세속적인 욕심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한결같은 사랑과 박애의 정신을 가진 분이었다…. 그처럼 모든 것을 선의로 보려는 분도 드물 터인데, 생전에 그분을 알아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치려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이 안타까웠다…'.

책 제목의 제자(題字)는 먼구름 한형석이 썼고, 휘호는 묵해 김용옥이 썼다. 윤인구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순전히 이 책 덕분이다. 안대영 관장은 "부인 방덕수 여사는 만년에 동래 중앙교회를 나와 나와도 가깝게 지냈다"면서 "윤인구 유고집은 부산대의 뿌리와 정신을 찾게 하는 천금같은 기록물이다"고 말했다.

윤인구의 발자취를 정리해 온 부산대 김재호(전자공학) 교수는 "윤 초대총장은 겸손하고 소탈한 분이셨다. 호도 없고 자서전을 내라는 권유를 뿌리쳤으며 마지막엔 동상을 만들까 걱정을 했다"면서 "그렇게 인간적인 분이 또 있을까 싶다"고 했다.


#'내가 바로 꿈이어라'

부산대가 현재 내세우는 모토는 'One PNU, 그대 우리의 꿈이어라'이다. 최고 일류를 지향하면서 꿈을 심어주고 키워주는 학문의 전당을 지향한다. 하지만 현실은 팍팍하기 그지없다. 대학정신은 왜소해지고 권력과 자본이 대학을 짓누르고 있다. '우리의 꿈'은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지난달 20일 오후 금정구 장전동 상남국제회관에서는 '부산대 건학정신 스토리텔링 콘서트'라는 이색 행사가 열렸다. 부산대 건학정신위원회가 주최한 행사로 윤인구 초대총장의 건학정신을 통해 새로운 비전을 찾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스토리텔링 전문회사 '이윰액츠'의 이윰 대표가 부산대 비전 스토리를 발표했다. "우리 청년들이 꿈을 못꾼다고 합니다. N포세대, 이태백, 사오정, 삼포, 오포, 헬조선 등 온갖 절망의 언사들이 난무합니다. 그런데 청년 윤인구의 눈빛을 보십시오. 모금을 통해 대학 설립자금을 모으고, 종 모양의 캠퍼스 도면 하나로 위트컴 장군을 설득해 캠퍼스 부지를 확보했습니다. 또 가장 어려운 시기에 최고의 대학본관과 무지개 문을 세웠습니다. 이는 꿈이 있어 가능했던 신화였습니다. 윤인구의 눈빛은 '나는 가능한 꿈이야!'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함께 자리한 젊은이들의 눈빛들이 반짝였다.

부산대는 지금 안팎에서 시련을 겪고 있다. 총장 직선제를 사수한 죄로 교육부가 예산을 싹뚝 잘랐고, 학내에선 상업시설 유치에 따른 후유증을 앓고 있다. 우수한 학생들은 지방을 떠나고, 지방대의 경쟁력도 떨어지고 있다. 이 난제들을 어떻게 풀 것인가.

윤인구의 초심에서 답을 찾을 수는 없을까. 청년 윤인구의 눈빛을 기억하고, 그가 꾸었던 꿈과 혁신적 교육사상에서 문제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새벽벌과 먼동, 문창성(文昌星)은 여전히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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