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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대기자의 人香萬里(인향만리) <1-4> 예술구국의 풍운아, 한형석- 대륙의 비련

전쟁이 만든 부부의 생이별…한·중 자식들이 아버지의 한 풀어주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6-01-31 19:02:21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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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중국의 시안 애국부인회 회원들이 광복군 제2지대를 위문차 방문해 찍은 사진. 앞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이범석 제2지대장이고,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한유한, 그 앞에 앉은 양장 차림의 젊은 여성이 강엽이다.
- 망명자 한유한과 중국처녀 강엽
- 사제지간으로 처음 만난 두사람
- 이후 예술가-음악가로 활동하며
- 연인으로 발전, 부부로 연 맺어

- 2차대전 끝나 홀로 귀국한 유한
- 공산화·전쟁 등으로 연락 끊기고
- 두사람 각자 재혼해 가정 꾸려
- 장남 "중국 이복형제 만나고파"

첫사랑은 달콤씁쓰레하다. 남자는 순정을 다 바쳤던 첫사랑을 쉽게 잊지 못한다. 젊은 예술가가 낯선 이국에서, 망명자의 처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한 여자와 첫사랑에 빠졌다면 그건 '사건'이다. 그런 꿈같은 일이 20대 중반의 한유한(한형석)에게 찾아왔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上海) 의거 후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한형석은 이름을 한유한(韓悠韓)으로 고쳤다. 한국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다. 사랑과 응전의 시간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그리고 여자는 남았고 남자는 떠났다.

# 가지 마세요

   
중국 시안의 섬서성보육원에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한유한.
1948년 9월 중국 칭다오항.

"선생님, 그렇게 가야만 하나요? 가지 마세요."

여자는 유한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울먹였다. 가녀린 어깨선이 한없이 출렁거렸다. 유한의 마음도 흔들렸다. 처음에는 같이 살기로 마음 먹었으나 시국이 뜻하지 않게 돌아갔다. 1945년 2차 대전 종전 후, 중국대륙은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 홍군(이후 해방군)과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군 간 내전이 벌어졌다. 대륙의 권력 판도는 예상을 뒤엎고 홍군 쪽으로 기울었다. 한국광복군은 국민당의 후원을 받은 터라, 홍군의 집권은 부담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유한의 노모가 아들의 귀국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유한은 이를 악물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미안하오. 아이들한테도 아비의 도리가 아닌 줄 아오. 당신을 어찌 잊겠소. 귀국 후 상황을 봐가며 내 다시 찾으리다. 그때까지 부디…."

잡았던 손을 놓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30여 년만에 조국을 찾는다는 감격이전에 사랑하는 처자를 두고 떠나야 하는 심정이 더 아팠다. 시안(西安)과 상하이, 지난(濟南) 등에서 중국 예술가들과 교유하며 혁명 노래를 만들던 일들이 어젯일처럼 떠올랐다. 어릴 때 떠났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뭉글 피어났다. 뱃고동이 길게 울었다. 유한의 울음소리도 커졌다. 배가 떠났다.

# 중국처녀 강엽

한유한이 중국처녀 강엽(1923~2004)을 처음 만난 것은 1935년 전후 산둥성 지난(濟南)에서였다. 이때 한유한은 지난의 산둥성립여자사범부속소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아동극장을 만들고, 학생 특별활동으로 음악 미술 연극을 지도하고 있었다. 중국소녀 강엽은 이 소학교의 학생이었다. 나이는 열 세살 아래였지만, 음악적 감성이 뛰어나고 아릿따운 여식애였기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한유한은 이때 이미 훗날 '결혼 상대'가 되리라 예감했는지 모른다.

한유한은 1933년 상하이 신화예술대학 예술교육과를 졸업하고 산둥성 무훈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신혁명군가'를 만들고, 중국 최초의 가극 '리나'를 창작하는 등 나날이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미남형의 총각선생 한유한은 학생들에게도 인기였다. 강엽이 한유한에 대한 짝사랑을 키웠던 것도 이 무렵인 것 같다. 1937년 7월 중일사변으로 한유한이 중국희극학회 제2항일연극대장으로 선임돼 학교를 떠나면서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 사이, 강엽은 지난에서 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중경국립음학원 성악과로 진학하여 음악도의 길을 걷는다. 인연의 재회랄까, 소프라노로 주목받던 강엽은 군 장병 위문 공연을 다니다가 시안에서 한유한을 다시 만난다. 한유한 앞에 선 강엽은 제자가 아니라 어엿한 여자였다. 한유한의 가슴에 연정이 싹텄고 급기야 둘은 사랑하는 사이로 변한다.

강엽은 1944년 8월 시안 청년당에서 개인독창회를 열었는데, 이 행사는 한유한이 기획한 것이었다. 비싼 입장료를 받았음에도 빈자리가 거의 없었을 정도로 행사는 성공적이었다. 한유한의 기획력이 또한번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독창회 이후 두 사람은 사제지간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신문학 운동을 통해 중국 혁명을 지도한 노신(魯迅)도 그의 제자 허광평(許廣平)의 구애편지를 받고 결혼하지 않았던가.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에서 활동 중이던 한유한은 강엽과 동거를 시작했고, 1945년 두 사람 사이에서 두 아들, 한가수와 한적수가 태어났다. 둘다 한(韓) 씨 성을 따랐다. 그 와중에 일제가 패망했다. 한유한은 광복군총사령부의 명을 받아 가족을 이끌고 대원 2명과 함께 지난 특파주임으로 온다. 지난은 강엽의 고향이자 한유한이 4년간 교사로 근무했던 곳. 신혼의 단꿈은 길지 않았다.

# 짧은 행복 긴 이별

한유한은 후일 회고글에서 중국에서의 연애담을 짧게 언급한 바 있다. "나는 그곳(시안)에 근무하는 동안 난생 처음으로 한 여인을 알게 되었다. 그 여인은 자기와 결혼해서 중국에 살자고 졸라댔다. 내 마음도 여인 쪽으로 기울고 있을 무렵이었다…. 1948년 9월. 배에 몸을 싣고 귀국길에 올랐으나 그 여인의 울부짖는 모습이 파도 속에서도 부서지지 않고 자꾸만 떠올랐다."

한유한과 강엽의 결혼은 독립운동가 김준엽의 수기 '장정'에도 언급돼 있다. '그(이범석)는 음악을 좋아하여 한유한 씨 내외와도 가깝게 지냈다. 한 씨는 작곡가로서 '제2지대가'와 '압록강 행진곡'을 작곡하였으며, 그의 중국 부인은 유명한 미모의 성악가였다….'

당시 김준엽은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 이범석 지대장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제2지대의 모체인 전지공작대 대원들과 자주 어울렸고, 한유한 부부와도 교유를 하고 있었다. 1945년 시안 애국부인회 회원들이 제2지대를 위문차 방문하여 찍은 사진 한 장이 전한다. 강엽이 한유한 앞에 앉은 건 우연이었을까.

한유한이 한국으로 떠난 후 강엽은 두 아들, 모친과 함께 상하이에서 생활했다. 정황상으로 보면 강엽도 한국행을 고민한 듯하다.

하지만 현실이 발목을 잡았다. 노모를 모셔야 했고 가족들도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뒤 중국은 공산화가 되었고, 6·25전쟁으로 한중 간의 통신이 두절되면서 한유한과 강엽은 이산가족이 돼 버렸다. 혁명과 전쟁이 야기한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미모에 실력을 겸비한 강엽은 그후 베이징으로 가 1954년부터 총정가무단 출방협(總政歌舞團 出訪協)에 종사하며 전속 독창자로 활동한다. 중국인명사전에는 그녀가 베이징 중앙희극학원 가극계 교수, 중국음악가협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며 성악 전문서적도 펴낸 것으로 돼 있다. 홀로된 강엽도 재혼을 했다. 남편은 등감교(鄧甘鮫), 당시 베이징 중앙연극학원 교수였다. 한때 항일연극대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다. 그후 강엽은 임파선암이 발병하여 2004년 2월 17일 베이징에서 81세로 타계했다.

#중국에 두고 온 처자

한유한은 귀국후 부산에서 제2의 삶을 살아간다. 부산문화회관 설립을 주도하고 영화를 만들다. 사재를 털어 서구 부민동에 자유아동극장과 색동야학원까지 세운다. 그리고 새 출발을 위해 1951년 4월 부산 동구 수정동에서 재혼한다. 어찌 회한과 고뇌가 없었을 텐가.

"아버지는 귀국 후 한동안 중국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아들 둘을 당신의 호적에 올려놓고 있었어요. 그 애틋한 부정(父情)의 깊이를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한국의 장남 한종수(56) 씨는 지금이라도 중국에 있는 이복형제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주변의 전언을 종합해보면, 중국의 작은 아들 한적수는 1967년 19세에 병으로 사망했고, 큰 아들은 생존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자식들은 아버지(한유한)가 가족을 버린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10여년 전 중국의 저명한 음악사학자 량마오춘(梁茂春) 교수가 김재승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런 정황을 읽을 수 있다.

'…강엽의 소재를 두루 파악했는데, 그녀의 남동생은 '한유한은 우리 누나의 인생을 망친 사람'이라며 한유한의 큰 아들 소재를 밝히기를 거절하더군요.'

   
한유한의 첫사랑은 혁명처럼 타올랐다가 전쟁 소용돌이 속에서 비련으로 끝났다. 아니다. 끝나지 않았다. 한국과 중국의 가족들이 60년 넘게 쌓아온 오해 아닌 오해를 푸는 일이 남았다. 양국의 자식들이 오해를 풀고 함께 부친의 산소가 있는 양산 솥발산공원묘원을 찾아 참배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후원: 부산광역시 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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