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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대기자의 人香萬里(인향만리) <1-3> 예술구국의 풍운아, 한형석- 가극 '아리랑'에 숨은 사연

대륙 감동시킨 항일가극…한국 최초의 오페라로 재평가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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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6-01-24 19:18:27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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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중국 시안에서 초연된 가극 '아리랑'. 총연출을 맡은 한형석은 남자주인공인 목동역까지 소화했다.(왼쪽) 이 작품은 70년이 지난 2010년 12월 부산문화회관에서 오페라로 재현됐다.
- 한형석이 극본 쓰고 총연출 맡아
- 초연에 장제스 총통 등 지켜봐
- 언론 "새로운 형식의 탄생" 찬사

- 2010년 부산서 오페라로 재연
- 70년 전의 감동·흥분 되살려

- 출연자 전영·심승연 극적인 만남
- 국적 넘어 부부로 파란만장한 삶
- 故 김재승 박사가 스토리 밝혀내

#대륙에 울려퍼진 '아리랑'

1940년 '아리랑' 초연 당시의 포스터(왼쪽)와 현지 신문의 공연평.
1940년 5월 22일 저녁, 중국 시안(西安) 남원문(南院門) 실험극장.

무대에 검은 갓을 씌운 석유 등잔불이 켜졌다. 음악이 깔리자 목동과 시골처녀가 등장해 아리랑산(山)에서 '봄이 왔네' '목동의 노래'를 부르며 사랑을 속삭인다. 그때 갑자기 일본군이 들이닥쳐 행복한 터전을 짓밟는다. 사람들은 쓸쓸이 '아리랑'을 부르며 고향을 떠난다. 35년의 세월이 흐르고 노인이 된 목동과 처녀는 한국혁명군이 진격해오자 가담해 일본군과 싸우다 장렬히 숨을 거둔다.

공연이 끝나자 객석은 박수와 환호, 눈물로 뒤섞였다. 항일 가극(歌劇) '아리랑'의 초연 무대는 성공적이었다. 총연출을 맡은 한형석(한유한)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혔다. 이 공연을 위해 한형석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극본을 쓰고, 작곡을 하고, 연출에다 남자 주인공인 목동역까지 소화했다. 등장인물만 60명, 오케스트라 단원 33명, 시안의 4개 합창단에서 100여 명이 가세해 총 출연자가 200여 명에 달했다. 출연진 규모를 보면 당시 시안에서 한형석이 갖는 예술적 위상과 역량을 짐작케 한다.

객석에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이하 한청)의 나월환(1912~1942) 대장과 장제스(1887~1975) 국민당 총통 등이 눈시울을 적시며 자리를 지켰다. 1939년 창설된 한청은 이듬해 광복군으로 전환된다. '아리랑'은 한청의 여름 피복비 마련을 위해 추진됐고, 실제로 공연 경비를 제하고 남은 4012원은 한청 대원들의 하복을 만드는데 쓰였다.

공연 후 현지의 '시안일보'는 "놀랄 만한 일이다. 신형식의 가극이며, 중국 가극계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는 주목할 만한 형식 실험"이라고 평가했다.

'아리랑' 공연 후 중국인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공연대가 지나간 지역에는 '아리랑' 노래가 유행했다. 심지어 중국군 장교들은 전선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아리랑을 아느냐"고 물어보고 노래를 알면 각종 편의까지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한형석은 부전자전 가슴 속에 갈무리해 온 '아리랑'을 꺼내 시안을 감동시키고 중국 대륙을 움직인 것이다.


#70년의 시공을 넘어

2010년 12월 29일 저녁 부산문화회관 대극장.

일본군이 점령했던 아리랑산에 태극기가 다시 걸리고 '조국행진곡'이 관객들의 박수 장단에 맞춰 장엄하게 울려퍼졌다. 작곡가 백현주가 편곡한 '아리랑' 노래가 출연자들과 관객들의 약속되지 않은 합창을 끝으로 막이 내리자 1700여 객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성이 메아리쳤다.

이날 재현된 '아리랑'(총감독 김성경)은 가극이 아닌 오페라였다. 한형석 탄생 100돌을 맞아 결성된 기념사업회(집행위원장 차재근)가 준비한 공연이었는데 그 의미가 각별했다. 70여년 전 중국 시안의 '아리랑' 초연 장면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아시아의 평화와 연대를 호소했던 가극 '아리랑'은 1945년 해방 전까지 중국에서 20여회 공연 되었으나 정작 국내 무대엔 올려지지 못했다. 1948년 동포송환작전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한형석이 악보를 미처 챙기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누구도 '아리랑'의 가치와 의미에 주목하지 않은 탓이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훌쩍 흘러갔다.

2000년 초부터 한형석이 조금씩 조명되면서 국내 최초의 오페라가 그동안 알려진 현제명의 '춘향뎐'(1950년)이 아니라, 한형석의 창작 가극 '아리랑'(1939년)이라는 견해가 제기됐다. 2004년 해양대 겸임교수였던 고 김재승 박사가 쓴 논문 '한국 최초의 오페라 작곡가 광복군 한형석'은 음악계 안팎의 폭넓은 공감을 얻었다. 음악가로서의 한형석이 재평가 되는 순간이었다.


#전영- 심승연의 극적인 스토리

'아리랑'의 출연자는 대부분 중국인이었지만 한국인도 몇 명 끼어 있었다. 그 가운데 전영(田榮)과 심승연(沈承衍)이 있었다. 한형석이 이들을 만난 계기와 이들이 국경을 뛰어넘어 부부가 된 사연, 그후 중국에서의 파란만장한 삶은 실로 드라마틱하다.

전영은 1915년 평북 의주 출생으로 고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3살 때 홍수로 흉년을 겪게 되자 그의 가족은 신의주로 이주한다. 전영은 18살 젊은 나이에 상하이로 망명 가서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연극을 통한 항일운동을 했다.

1938년 10월 무한에서 임시정부의 소극적인 항일운동에 반발한 사회주의 성향의 조선청년들이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자 전영도 여기에 참가한다. 그후 섬서성 진동남 지구에서 일본군에 맞서 척후공작 중 중국군에 체포돼 투옥되지만, 조선인임이 확인되어 1940년 봄 가까스로 석방된다.

석방된 전영은 조선의용대를 찾아 황하를 건너다 다시 국민당 호종남 군(軍)에 잡혀 시안으로 압송된다. 시안 감옥에서 그는 한족처녀 심승연을 만난다. 심승연은 일기장에 사회주의 성향의 글을 적었다가 잡혀온 터였다. 그녀는 맞은편 옥사에 있는 청년이 항일운동을 하는 조선인임을 알고 관심을 보였고, 몇차례 접촉 후에 사모하게 된다.

시안 감옥에서 전영은 간수 왕패장의 주선으로 항일 음악활동을 하고 있던 한국인 한형석을 알게 된다. 당시 한형석은 중국 국민당군 간부훈련단 제4단 주임교관(중령)으로 호종남 군의 고위층과도 유대가 돈독했다. 한형석은 인맥을 동원해 전영을 석방시켜 그를 시안으로 데리고 온다. 그때 심승연도 혐의를 벗고 풀어나 있었다.

한형석은 시안의 한청에서 항일가극 '아리랑'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에겐 경험있는 배우가 필요했는데, 때마침 전영이 나타난 것이었다. 감옥에서 전영을 사모한 한족처녀 심승연도 불렀다. 이렇게 하여 '아리랑'의 남자주인공 목동역은 한형석, 조연인 목동 아들역은 전영, 여자주인공 시골처녀역은 심승연이 맡았다. '아리랑' 준비 과정에서 전영은 광고를 만들고 무대미술을 담당했다. 한청 대원들은 전영의 참여를 반겼고, 전영과 심승연은 예술동지로 사랑을 키우다가 부부가 되었다.


#고 김재승 박사의 추적

전영-심승연 스토리는 고 김재승 박사의 끈질긴 추적과 연구 덕분에 개략적 윤곽이 드러났다. 김 박사는 2004년 자비로 중국을 취재하면서 전영은 조선 출신이고, 그보다 세 살 위인 심승연은 중국대륙에서 저명한 화가 심일천(沈逸千)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들 부부의 행적을 추적했다. 김 박사는 미완으로 남은 '한형석 평전' 초고에 '전영·심승연 부부와의 기연(奇緣)'이란 제목하에 이들의 스토리를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아리랑' 공연 후 전영 심승연 부부는 옌안(延安)을 거쳐 심승연의 오빠인 심일천을 찾아 유린(楡林)으로 들어가 '신중국만세'라는 연극에 참가한다. '신중국만세'는 한형석이 1939년말 시안에서 완성한 3막짜리 항일가극이었다. 1946년 국민당군과 홍군의 갈등이 깊어져 내전으로 확산되자, 전영 부부는 새로운 삶을 모색했다. 전영은 고국으로 가려고 시안을 찾았으나 한국광복군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상하이로 간 전영 부부는 중공정권에 적응하며 예술활동을 펴 나갔지만, 한국전쟁 직후인 50년대 중반 '예술사업에 대한 견해가 당과 다르다'는 이유로 반혁명분자로 몰려 집단농장으로 보내졌다. 60년대 문화혁명의 소용돌이는 이들의 삶을 더욱 옥죄었고, 부모의 사상문제로 자녀들은 대학 진학도 포기해야 했다.

70년대말 복권이 된 전영은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80년대 중반 국민당 감옥에서 보고 들은 사실을 토대로 중편소설 '춘추산의 총소리'를 썼고, 부인 심승연과 함께 겪은 옥중체험을 바탕으로 장편소설 '장안천리'를 펴냈다. 전영은 1987년에야 '중국 국적'을 취득했으나 '무국적자'의 신세를 벗은지 4년만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항일투쟁기에 예술을 무기로 대륙에서 눈부시게 활동한 한형석과 전영은 여러모로 닮은 점이 있다. 독립운동을 했지만 망명자이면서 경계인의 처지였고, 그들의 삶 절반은 아직도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한형석이 칭다오에서 마지막 귀국선을 타지 못하고 중국에 남았더라면, 아마 전영의 전철을 밟지 않았을까. 시대상황이 만든 운명적 갈림이 섬뜩해진다. '예술구국'의 대의를 좇은 두 천재 예술인에 대해 조국은 그동안 너무 무심하지 않았던가.

※후원: 부산광역시 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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