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즉 가마골이라는
- 명칭의 유래가 된 증산을 뒤로 두고
- 부산진성과 영가대 등
- 역사의 중심이었던 공간, 좌천동
- 어느 고즈넉한 오후
- 옛 부산포 주변을 거닐며
- 시간을 오고가는
- 작은 여행을 해보기를 권한다
# 1, 2번 출구, 모교의 추억
고등학교 배정 당시, 소위 말하는 뺑뺑이 덕분에 부산 남구 토박이였던 필자는 엄청난 시련을 겪고 말았다. 남구에 위치한 수많은 학교들을 제치고 하필 동구 좌천동의 금성 고등학교에 배정됐기 때문이었다. 체육을 옥상에서 한다, 옛날엔 깡패 학교였다, 남선생 집합소로 빠따가 난무한다, 체력장을 다대포에서 한다… 등등 금성고의 풍문이 바야흐로 무림 사파 최고봉일 때의 일이다.
중3 담임의 입에서 배길남과 금성이 함께 발표된 순간 "샛별! 샛별!"하고 포효하던 60명 급우의 환호성이 아직도 쟁쟁하게 울려온다. 금성(錦城)이 금성(金星)과는 분명 다르건만 천방지축 꼴통들은 미지의 세계로 쫓겨 가는 친구를 그렇게 배웅했었다.
그런데 그 공포의 학교에 처음 가던 소집일, 필자는 지각을 하는 대실수를 저질렀다. 영도로 가는 109번 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허치슨 부두 앞 매축지 마을 앞에서 하차했기 때문이었다. 딱 봐도 미로 같은 마을 너머로, 철길 너머 저 멀리 언덕에 위치한 금성고 건물은 낭떠러지 끝의 드라큘라 성과 별 다른 게 없이 느껴졌다.
그 이후 겪은 수난을 글로 어찌 다 표현하랴? 매축지 마을의 막다른 골목길을 담튀기를 하고, 생경스러운 철길과 철제 담장 사이를 헤매며, 철길 위를 가로지르는 철교를 건너, 굴다리 밑의 터널을 지나니, 마침내 나타난 것이…, 바로 부산도시철도 좌천역 2번 출구였다. 그 당시 특별한 느낌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늦으면 안된단 생각에 1번 출구를 향해 무단횡단으로 달렸던 기억밖에는….
그렇게 좌천역은 그렇게 썩 반갑지 않은 첫 인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실 좌천역은 금성고 출신들에게 꽤나 멋진 역할을 해준 곳이었다. 방과 후 사복으로 갈아입고 총알같이 남포동 '신천지'나 서면 '비둘기'에 가려면(아, 내가 너무 옛날 사람인건가?), 어쨌건 미팅하는 커피숍에서 '파르페'라도 먹으러 시내로 달려갈 때 전철만큼 빠른 게 또 어디 있겠는가.
으흠, 학창시절의 추억으로 서두가 너무 길었던가. 자, 이제 각설하고 본격적인 탐사에 들어갈 때이다.
# 3번 출구, 좌천(左川)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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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만세운동이 벌어졌던 좌천동 일신여학교. |
좌천역은 범일역과 부산진역 사이에 위치한 도시철도역이다. 1987년 5월 15일, 부산시 동구 좌천동의 행정구역명을 따서 '좌천동역'이라는 역명으로 개통되었다. 좌천역은 그 이름과 관련해 설명할 거리가 좀 있다.
첫째, 2010년 부산도시철도 1호선 역명 개편으로 공식 명칭이 '좌천역'으로 바뀌면서 부산은 두개의 '좌천역'을 소유하게 된다. 또 다른 좌천역은 기장군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자까지 左川으로 똑같다. 하지만 직선거리로 26㎞ 떨어진데다 동해남부선이 폐선 되는 바람에 사진 촬영지 역할을 하고 있다 하니 혼동의 염려는 없겠다.
둘째, 좌천(左川)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
이곳의 지명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수록된 좌자천(佐自川)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좌자천은 가야산에서 시작되어 수정동을 거쳐 지금의 자성대까지 흘러가는 하천이었다. 한자로 표기된 '좌자'가 태풍의 피해가 '잦아'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물이 깊지 않고 '잦은'물(밑바닥에 깔린 물)이기 때문이란 설이 있다. 또 근처 마을 이름이 음란하게도 '자지내 마을'인 바람에 한자 이름을 붙였다는 가설도 있다.
뭐 어쨌든, 이름의 유래들을 살펴보면 이곳의 환경이 썩 아름답고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다는 유추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추리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있는데 바로 좌천에 위치했었던 두모포 왜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다.
두모포 왜관은 광해 1년인 1607년에 이곳에 들어서서 초량왜관으로 이전하기까지 72년간 자리했었다. 크기가 약 1만평으로 좁았고, 해수역이 낮은 탓에 모래가 날리고 배가 들어올 수 없었으며, 구릉에 위치해 지나는 조선인들이 주거하는 일본인들의 안방까지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72년간 쉬지 않고 불편을 호소하고 조선 정부에 이전 탄원을 넣었다. 결국 왜관은 대공사를 거쳐 10만 평 규모의 초량왜관으로 이전하게 된다.
#2·4번 출구, 매축지 마을과 영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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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축지 마을의 골목길 풍경. 국제신문 DB |
좌천역은 2번 출입구(삼일·삼성·보림 극장으로 통했던 중앙대로와 연결)와 4번 출입구(문현 대연으로 통하는 자성로와 연결)가 같은 출입구를 공유하고 있는 특이성을 지닌다. 이곳을 거론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는데 영화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매축지 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매축지 마을에 대한 한 일간지의 소개를 그대로 옮겨보자.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해안을 매립해 만든 땅으로 일본군이 막사를 짓고 말을 키우는 축사로 이용하면서 형성됐다고 한다. 6·25전쟁으로 몰려온 피란민과 노동자들이 모여 살며 부산의 근현대사를 함께 했다. 1990년대 이후 개발 바람에 밀려 도심 속 오지로 남았고 열악한 주거환경을 형성하고 있다.'
도심 속 오지, 열악한…, 딱 들어도 영화 주인공들이 분노하고 탈출하고 싶은 배경임이 분명하다.
2번 출구를 나와 자성로 지하를 관통하는 굴다리를 지나면 길은 철길에 막히지만 경부선 위를 지나는 철교가 길을 대신한다. 매축지 마을은 보물지도의 길처럼 지하와 공중을 오고가며 그렇게 등장한다.
필자의 개인적 의견인데, 인근 가장 큰 교회인 제자로 교회를 기점으로 오른쪽(고층 아파트와 곰표 밀가루가 있는 지역)과 왼쪽(벽화마을, 큰 굴다리, 성남초등학교(영가대 자리)가 있는 지역)을 나누어 살피면 매축지 마을의 오묘한 분위기를 좀 더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매축지 마을에서 사진을 찍을 때의 일이다. 재개발이 중지되어 을씨년스러운 3층 건물에 카메라 렌즈를 맞추는데, 쌀집 앞 평상에 앉은 아지매가 "다 뿌싸진 건물을 남사스럽구로 와 찍노 몰라?"하고 핀잔을 준다. 그러자 그 옆에 서 있던 다른 아지매가 "젊은 아아들이 넘에 집안을 대놓고 찍어 쌓고 그란다. 나는 마 찍지 마라 칸다 아이가"하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온다. 무슨 일인가 미닫이문을 열어보던 아저씨가 사태를 파악했는지 씨익 웃더니 "젊은 양반 굴다리는 가 봤는교? 거어 사람들 많이 가데"하며 친절을 베푸신다.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감을 느끼면서도 이상한 나라를 잠시 구경하러 온 여행객의 행태에 쓴웃음을 흘려본다.
# 5·7번 출구, 역사의 거리
좌천역 5·7번 출입구를 나와 일신기독병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병원은 1952년 자매 의료선교사에 의하여 설립되었다고 한다. 병원을 찾아 그 뒤쪽에 있는 정공단로를 찾으면 그야말로 역사의 거리가 등장한다.
먼저 대표적 역사의 현장으로 정공단을 들겠다. 정공단은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 10호로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부산첨사 충장공 정발 장군과 군민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제단이다. 이곳은 정발 장군이 실제 전사했던 부산진성의 남문자리이다. 앞서 소개했던 매축지 마을이 바다였을 것이니 좌천역 부근은 바닷가였을 것이고,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이 앞을 까맣게 뒤덮었을 것을 상상하니 살짝 소름이 돋기도 한다.
계단을 올라 정공단의 삼외문으로 들어서면 충장공정발전망비가 세워져 있고 장군에 대한 소개와 함께 담장으로는 군민들을 위한 비들이 세워져 있다. 또 한 번 계단을 올라 삼내문을 지나면 참배를 드리는 단이 나온다. 근처에서 학교를 다녔음에도 그냥 지나치기만 했지 직접 들어와 본 것은 처음이다. 두 손을 모으고 참배를 하려는데 비석의 빨간 글씨들을 보자 뜻밖에도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온다. 드라마에서나 접했던 역사의 흔적이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왜적을 막다 쓰러졌던 몇 백 년 전의 죽음들…. 역사는 시간 속에 묻힌 듯 하지만 현재의 우리들 곁에서 함께 숨 쉬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다.
정공단 오른쪽으로는 고즈넉한 담장길이 있다. 정공단 너머 부산진교회가 살짝 보이는 길이다. 이곳 입구에는 작은 비석이 하나 서있는데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20년간 봉사를 했다는 영국인 매견시 목사의 기념비이다.
정공단을 지나 조금만 더 걸어가면 왕길지 기념관을 찾을 수 있다. 그는 부산에서 가장 오래 된 교회라는 부산진교회의 초대목사이다.
이제 오르막을 오를 차례이다. 오르막을 조금 오르면 일신여학교 건물과 부산진교회가 나타난다. 일신여학교는 빨간색 벽돌이 인상적인 곳으로 부산시 지정기념물 제55호이다. 일신여학교는 3·1운동 당시 교사와 학생들이 참가하여 부산지역 최초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신여학교 바로 앞에는 역사 깊은 부산진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부산 근대의 역사를 너무나도 잘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앞에 있는 부산진교회 사료실에는 귀한 자료들이 많으니 한번 들러보자.
부산진교회까지 들렀다면 운동을 조금만 더한다는 생각으로 필자의 모교인 금성 고등학교 앞으로 올라가 보자. 금성고 앞 도로에서 바다를 살피면 그리 높지도 않은데 부산항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여러분은 바야흐로 오리지널 부산포의 전망을 확인하는 것이다.
# 6·8번 출구, 가구 거리와 영가대
좌천동 가구 거리는 좌천역 출입구를 모두 끼고 양쪽 길가로 쭉 형성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대 가구 상가로서 가구하면 좌천동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했고, 한때 100여 개의 나전 칠기 업소가 밀집해 있었다고 한다.
1950년대 부산항으로 수입되는 원목을 가공하는 목재소가 하나, 둘 들어서면서 목재를 제재하는 제재소가 생겼고, 이후 목재 가공으로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간이 가구를 제작하는 가구 공장들이 자리 잡았다고 한다. 제작된 가구는 인근에 판매를 위한 매장을 개설하며 직영 가구 매장의 형태로 형성됐는데, 도시철도 좌천역이 생기기 전인 1980년 중반까지는 가구 골목이라고 불리다가 도로가 넓어져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자, 이제 조선통신사가 출발하고, 대일 사신들이 제사를 지냈던 부산의 관문 영가대를 찾아 볼 때이다. 가구 거리를 걷다보면 철길을 건너는 철교가 또 하나 등장하는데 그곳을 건너면 매축지 마을과 연결되는 성남초등학교를 찾을 수 있다. 이곳은 그 옛날 영가대의 터로서 자성대 쪽 조선통신사 역사관이 그 역사를 기리고 있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움을 가지게 한다.
#좌천역, 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좌천동은 가마골 부산(釜山)이란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는 증산(甑山)을 뒤로 두고, 부산진성과 영가대, 부산포 등 역사적 공간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좌천역 주변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숨겨진 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라 할 것이다.
어느 고즈넉한 오후, 옛 부산포 주변을 거닐며 시공간을 오고가는 작은 여행을 해보는 것은 어떠실지?
배길남 소설가
※ 공동기획: 동서대학교,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