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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대기자의 말하는 두레박 <14> 김재승의 탁월한 논문들

자칫 잊혀질 뻔한 부산 독립운동사·개항사 발굴한 지역학계 '이단아'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5-10-27 18:56:54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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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있는 고(故) 김재승 박사의 생전 연구실. 이용득 세관박물관장과 김 박사의 부인 이경희 씨가 고인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 박차정 남매·강근호 항일투쟁 등
- 가려진 독립운동가 족적 찾아내
- '논문은 자료가 말한다' 진리 확인

- 각국 우표 수집하며 연구하다
- 부산 항만·해운사로 관심 이어져
- 희귀자료 찾아 세계 곳곳 휘저어
- 근대 한영해양교류사 논문 업적

- 영도 생전 연구실엔 책·자료 가득
- 지인들 "개항기 부산 연구의 밀알"
- 스승 시조시인 김상옥 유품 간직

부산의 항만사, 해운사, 독립운동사 자료를 들추다보면 피할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김재승(金在勝·1943~2011)이란 분이다. 몇년 전 별세한 탓에 세인들에겐 잊힌 인물이 되었지만, 그가 남긴 연구성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밤바다의 등대처럼 빛난다. 그가 쓴 논문들은 자료부터 달랐다. 단순히 인용하거나 의미 부여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원전의 창고를 털거나 원석을 갈무리해 내놓았다. 신선한 재료로 요리(논문)를 하니 맛있는 건 당연. 영양가 있는 논문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눈부신 독립운동사 연구

2005년 9월 사이드 보탐 선교사 후손들의 방문을 받고 부산세관박물관을 안내하는 김재승(오른쪽) 박사. 사이드 보탐은 개항기 부산의 사진을 많이 남겼다. 이용득 씨 제공
'두레박'으로 김재승이란 인물을 퍼올리기로 한 건, 광복 70년을 맞아 지역의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하는 과정에서 접한 그의 탁월한 논문들 때문이다. 동래 출신의 항일투사 박차정의 오빠들, 즉 박문희·문호 형제의 가려진 항일투쟁 이력을 발굴해 세상에 알린 사람이 김재승이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박차정 가문의 웅혼한 독립운동사는 세월없이 골방에 갖혀 있었을 지 모른다.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운 애국지사 강근호(일명 강화린)의 투쟁담을 정리해 복권시킨 이도 김재승이었다. 2000년 초 김재승은 '만주벌의 이름없는 전사들'이란 책을 통해 강근호의 족적을 캐냈고, 한동안 '강근호 기념사업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크리스천 의열단 비밀단원 고인덕의 사망원인이 자살이 아니라 일제의 잔악한 고문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규명했다. 항일예술가 먼구름 한형석에 대한 연구는 결국 미완으로 남았지만, 그의 글로벌한 예술구국 개념을 새롭게 읽는 계기를 제공했다. 동아대 백성도 특임교수의 부친 백천수 육군대령의 무공훈장을 되찾아 국립묘지에 가게 한 것도 그였다.

김재승의 연구는 '논문은 자료가 말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일깨웠고, 전공자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미답의 영역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1980년대 이후 김재승은 지역학계의 혜성이자 이단아였다.


#우표 수집이 연구욕 촉발

근대한영해양교류사(왼쪽), 구한국 우표의 실상
김재승은 생전에 번듯한 대학교수도, 각광받은 연구자도 아니었다. 그의 마지막 직함은 한국해양대 강사·(주)세동양행 대표였다. 뒤늦게 박사 학위를 땄지만 학계에선 '튀는' 아웃사이더 정도로 취급했다. 김재승은 개의치않고 자기 연구를 심화시켰다. 관심 영역이 개항사, 항만사, 해운사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사, 지역 근대사를 넘나들었다. 넘기 어려운 산을 만나면 전 세계를 무대로 희귀자료를 뒤졌다. 연구과정에서 오류나 오기, 논쟁적인 사안을 만나면 쩨쩨하다 할 정도로 세밀하게 따졌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논문의 완성도를 높였다.

김재승의 연구 출발점에는 우표(stamp)가 있다. 우표 수집은 학생시절부터 중요한 취미였다. 동아대 영문과를 나와 영도에 세동양행이란 선용품을 회사를 차리고 해외로 돌아다니면서 우표는 연구를 촉발하는 물표로 바뀌었다. 각국의 우표에는 그 나라의 역사와 시대정신이 녹아들어 있다. 우표는 때로 세계사가 되고 문화사가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文位郵票)는 1884년 우편제도 도입과 우정국 개국의 역사가 맞물린다. 문위우표는 경우에 따라 1000만 원을 호가하지만 가짜가 많았다. 김재승은 '최초'와 '가짜'라는 말에 꽂혀 우표 연구를 시작했고, 100여년 전 한국과 미국, 영국의 자료들을 섭렵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한국 문위우표 사용필(畢) 연구'. 이 논문은 1996년 이스탄불 세계 우표수집가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당시 영국의 심사위원은 이 논문의 영문 참고 문헌 리스트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김재승은 1998년 'The Facts of Korean Classic Stamps(구한국 우표의 실상)'라는 영문판을 출간했다. 보기 드문 작업이다.

우표를 찾다보니 근대문물의 교류에 눈을 뜨게 되고 그것이 통신, 선박, 해양, 항만분야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우표가 여타 연구의 마중물이 된 셈이다. 한 인터뷰에서 김재승은 "개항기 부산의 자료 수집에만 집 두어 채 값이 들어갔다"고 말했을 정도로 열정을 쏟았다.


#'최초의 연구' 업적들

김재승 박사의 옛 연구실 한켠에 보관돼 있는 시조시인 김상옥 선생의 유품.
김재승의 연구 중에는 '처음' '최초'란 수식어를 갖는 것이 적지 않다. '한국근대해군창설사'(혜안, 2000년), '근대한영해양교류사'(인제대 출판부, 1997년), '한국 최초의 기선선장 신순성'(월간 해기, 1980년), '한국 최초의 신조발주 기선 광제호'(월간 해기, 1979년) 등이 모두 '최초'의 근원을 추적한 성과물이다.

'근대한영해양교류사'는 1797년 부산 용당포에 영국해군 소속 해양탐사선 프로비던스호가 정박해 8일간 머물면서 동래부와 교섭한 과정을 다룬 역작이다. 이는 한영 양국의 첫 접촉 기록이다. 김재승은 당시 프로비던스호의 브로턴 선장이 항해기를 남긴 사실을 알고 그것을 입수해 논문을 썼다. 이 책은 문화체육부 추천 도서로 선정될만큼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국근대해군창설사'는 고종 때 강화도에 영국 군사교관을 초청해 해군사관학교를 창설했다는 내용을 담은 연구서다. 이 책은 선교사 알렌의 한국 근대사 연표에 나와 있는 영국 해군 대위 칼웰(Callwell)이란 인물로부터 출발한다. 김재승은 영국 해군도서관, 국방성 자료실, 국립해양박물관 등에 편지를 보내 칼웰의 자료를 탐문했고, 현지 자료조사원까지 고용해 족적을 뒤졌다. 수소문 끝에 영국인 학자가 비슷한 자료를 조회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A4 용지 700장 분량의 알짜 자료를 건질 수 있었다. 자료 수집에 나선지 2년만의 일이었다. 구한말 한국 근대해군 창설 비사는 이런 자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재승의 논문은 대부분 이런 식의 시행착오와 끈질긴 추적 끝에 씌어졌다. 그가 펴낸 10여권의 연구서와 100여 편의 논문 하나 하나가 소중하게 다가온다. 부산의 근대사 연구자들이 일제 강점기 일본인의 기록을 인용·답습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김재승의 글쓰기는 이를 극복했다는 평가도 얻고 있다.


#시조시인 김상옥과의 인연

영도구 남항동 대평초교 옆 세동양행 건물 5층. 20여평 규모의 사무실에 자료 박스들이 즐비하다. 비슷한 크기의 옆방에도 온통 책과 자료들이다. 오래 비워둔 탓인지 사무실에 먼지가 버석거린다.

"남편이 생전에 썼던 연구실입니다. 여기 오면 책 보고 글 쓰는 일밖에 안 했어요. 그게 가장 행복했던가 봐요. 세상 떠난지 4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하고 싶은 연구를 더 많이 할 수 있었을텐데…."

김재승의 부인 이경희(72) 씨는 여전히 남편을 못잊어 하는 눈치다. 자료 박스에는 희귀자료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해운 항만관련 희귀자료 사진만도 3000점에 이른다. 그래서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김재승이 남긴 자료는 '부산대 로컬리티 아카이브' 연구팀에 의해 1차 목록 정리가 되어 '김재승 컬렉션'으로 소개돼 있다. 하지만 지역학계는 김재승의 연구를 누가 어떻게 이을 지 별로 관심이 없다.

김재승을 잘 아는 주변의 지인들은 그를 진정한 의미의 학인(學人)이라 평가한다. 그와 누구보다 가깝게 지냈다는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은 "그는 자료가 있는 곳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구하러 다녔으며 그것이 개항기 부산 연구의 밀알이 되었다"면서 "자료를 바탕으로 명쾌하게 풀어내는 글쓰기는 후학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 관장 외에도 백성도 동아대 특임교수, 부경대 윤광운 명예교수, 서세욱 목요학술회 이사장, 한건 향토사학자 등이 김재승의 지인으로 알려져 있다. 부산대 공대 김재호 교수는 그의 친동생이다.

김재승의 옛 연구실에서 시조시인 김상옥(1920~2004)의 유품을 만난 건 뜻밖이었다. 부인 이 씨는 "김상옥 선생은 우리 부부의 주례를 봤을 정도로 일찍부터 가까이 지냈다. 남편은 그를 사부처럼 받들었다. 돌아가실 때 유품을 맡기시며 통영시에서 기념관을 지으면 보내라고 하셨는데 아직 연락이 없다"고 했다. 통영 태생인 김상옥은 1950년대 후반 경남여고 교사로 근무하는 등 부산과도 인연이 깊다. 고인이 된 두 사람, 사제(師弟)의 유품이 산자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고 있다. 김상옥의 유품은 응당 통영으로 가야 할 테고, 김재승의 자료는 마땅히 새로운 임자를 만나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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