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과 떨어져 33년을 행려병자로 정신병원에서 지낸 A(57) 씨의 사연(본지 지난 16일 자 8면 보도)이 알려지면서 행려병자의 실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행려병자 대부분은 자신의 진짜 이름, 나이조차 알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행려병자는 ▷일정한 거주지가 없는 자 ▷경찰서나 소방서를 통해 병원으로 이송된 자 ▷의사 진단서상 응급환자로 확인되는 자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있어도 부양능력이 없고 또는 부양을 기피하는 자 등 4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 관리번호 '3'으로 시작하는 인생

19일 부산시에 따르면 일선 16개 구·군이 관리하는 전체 행려병자는 지난해 10월 기준 488명에 달한다. 2007년 1193명보다 절반 이상 줄었지만, 여전히 많은 숫자다. 부산 사하구가 142명으로 가장 많고, 해운대구 85명, 금정구가 55명 등의 순이다. 나머지 지자체는 10~20명 안팎의 행려병자를 관리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길을 떠돌다 경찰에 의해 병원 또는 요양원으로 보내진다. 경찰은 지문·사진 등 신분 조회를 거쳐 확인되는 경우 가족에게 보낸다. 신분이 조회된다고 해도 가족의 보호를 받는 예는 드물다. 상당수 가족이 인계를 거부한다는 게 경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무적자'는 곧바로 행려병자로 분류돼 주민등록번호 대신 '3'으로 시작되는 행려병자 관리번호를 부여받는다.

■ 신원 조회 '원스톱'으로 바꿔야

행려병자 관리는 관할 자치단체가 맡는다. 지자체는 보호의무자로 연 2회 이들이 있는 요양원 또는 병원을 방문해 수진 실태를 점검한다. 지자체는 최초 경찰의 신분 조회와 별도로 세 차례의 신원조회, 한 차례 유전자 감식을 진행한다.

하지만 신원조회 과정에서 자신의 신원을 찾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지난 8년간 구·군별로 신원이 확인된 예는 2~10건 안팎이다. 오래전 주민등록이 말소돼 무적자가 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현행 신원조회 체계 개선의 목소리도 높다. 지금은 지자체에서 행려병자의 지문을 채취한 뒤 경찰에 신원 조회를 의뢰하는 절차를 거치는데, 경찰이 지문 채취부터 신원 조회까지 모두 맡는 게 효과적이라는 지적이다. 앞서 33년 만에 가족을 찾은 A 씨도 2007년 잉크 지문채취 당시 신원 확인에 실패했지만 지난해 경찰이 분말을 이용한 고체식 지문 채취를 통해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주민번호 재등록 절차 개선을

신원 확인이 되더라도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거나 인계를 거부하면 행려병자의 생활을 계속 해야 한다. 보호의무자인 지자체나 담당 병원에서 주민등록번호 재등록을 추진하지만, 까다로운 절차 탓에 이마저 쉽지 않다. 가족이 실종 또는 사망신고를 했을 때에는 법원의 실종신고 취소 판결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실종 신고를 한 가족이 직접 취소 신청을 해야 한다.

주민등록번호 재등록을 못 하면 기초생활수급대상자 지정을 할 수 없다. 기초수급자로 지정되면 병원비 외 20만 원 안팎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탓에 대부분 사식조차 먹을 수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을 보낸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기초수급자나 홀몸노인 등 일반적인 사회적 약자에게는 보조금이 지원되지만, 행려병자는 병원비 지원밖에 없다"며 "이들의 기본적인 처우개선을 위해 주민등록번호 재등록 절차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