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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담 스님과 공초 오상순을 모셨던 승려시인 박혜명 스님이 국화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
- 12세 때 입산해 50여 년 수행
- 심오한 정신세계·서정 나타나
- 소설가 오상순과 깊은 인연
- 고려 선찰 위상 찾기 매진도
지난 8월 '열전문학' 본상 수상작 5편이 실린 유인물을 우편으로 받았다. 북구 만덕동 만덕사 주지인 금산(金山) 박혜명(70) 스님의 시편이었다. 1987년 고려 선찰 만덕사 주지로 임명된 이래 26년간 만덕사의 위상을 되찾겠다는 서원으로 일관해온 분이어서 시인으로 추천된 일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출발이 있었다 / 먼 길도 있고 짧은 길도 있었다 /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도 있다 / 이 산 저 산 넘나드는 길도 있다 / 태산 같은 어려운 길도 있고 / 넘으면 또 넘어야 되는 길도 있었다 / 평탄한 길도 있으며 가시밭 길도 있다…'. ('길' 중에서)
금강경에서 보듯 물질적으로 본 세상은 허공이다.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 오는 것 가는 것 자취도 없는 것이 인생인 것을. 그래서 스님의 시의 세계는 지극히 평범하면서 세상 어떤 언어 문자로 풀 수 없는 고차원의 인간세계를 풀어 놓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수도(修道)와 시도(詩道)를 합일시켜 독특한 울림과 가락이 심오한 영혼의 노래로 독자의 공감대를 확장시켰다는 심사위원(성기조·문효치 등)들의 심사평도 그러하다. 요즈음 얄팍한 감성과 가벼운 서정에만 그쳐 버리는 작태를 초월한 심원한 함축성을 발견한 것이라 부언하고 있다.
추천 시 '길'과 '인생항해' '꿈꾸는 삶' '회고' '낙화유수' 등이 이른바 수도자의 게송(偈頌)처럼 난해하지도 않고 평범하나, 스님은 그 보편적인 것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으려 했나 보다.
혜명 스님의 속명은 박고홍이다. 일본 유학 갔다가 비행기 전문기술자로 활약한 부친의 슬하에서 태어나 해방과 함께 귀국해 경북 상주 박씨 세거지에 정착한다. 상주초등학교 6학년 때 외할아버지가 주석(승려가 입산해 안주)하는 전남 장흥의 신흥사에 갔을 때 "너는 명이 짧으니 중이 되어야 한다"는 외조부의 명에 따라 천수경, 반야심경을 사흘 만에 암송해냈다. 목탁도, 종 치는 법도 배웠다. 스님의 길을 깨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열두 살(1955) 때 장흥 보림사에 입산하여 사미계를 수계하였다. 1957년 밀양 표충사에서 비구계를 수계하고 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한다. 1961년 가을부터 서울 조계사에서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을 지낸 청담(靑潭) 스님을 10년간 모시며 행선지마다 그림자같이 동행한다.
1962년 은사 스님의 명에 따라 소설가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의 시자(侍者)가 되어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마누라는 없어도 담배 없인 안 돼."
청담 스님의 배려로 조계사 법당 뒤의 청련회관 방 한 칸을 쓰고 있던 공초는 아침저녁을 조계사에서 먹고 점심은 청동다방에서 담배 1갑, 달걀 반숙 2~3개, 커피 한 잔으로 해결하였단다. 밥상을 들고 간 시자 혜명을 위해 시 한 편을 써 놓고 기다렸다. 혜명은 이 시를 수시로 암송하면서 자신도 시 세계로 빠져들었다. 어느 몹시 추운 겨울밤, 군불 지피는 것을 깜빡 잊어 냉방에서 잠이 든 공초는 이튿날 숨을 거두고 말았다.
혜명은 이때의 일을 두고두고 잊지 못해 지금도 속죄하는 심정으로 산다고 한다. 주인 없는 공초의 방에는 코트 한 벌, 양복 두 벌, 셔츠 두 벌, 양말 세 켤레, 내복 두 벌, 구두 두 켤레, 안경, 만년필만 남아 있었다. 스스로 무아의 세계를 실천적으로 보이고자 노력했던, 그래서 수도인처럼 생활했던 공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뒷산에 진달래꽃 하늘 하늘 / 계곡물 흘러 흘러 / 마을 앞 내천에 봄이 왔어요 / 우리 동네 귀염둥이 송아지도 복술이도 뛰어놀고 (중략) 청산에 푸른 계곡 / 님따라 꽃향기 / 싱그러운 그대의 숨소리 / 봄 이슬에 잠긴 / 당신의 입술 (중략) 사랑의 여울 / 산 따라 강물 따라 / 어느 곳 어디라도 / 따라가리라 / 봄이 흐르고 꽃이 피는 곳이라면'. ('봄날은 간다' 중에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두 가지 모두에 초연했던 공초의 무소유 정신이 몸에 밴 혜명 스님은 문득문득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써온 시를 어느덧 세상에 내놓았다. 그렇다고 승려시인이란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주석하는 만덕사에 시인 구상(1991)이 찾아온 데 이어 서정주(1992) 고은(1994) 등이 잇따라 찾아왔다. 그 사이 만덕사지엔 부산박물관 등에서 1차와 2차, 3차 발굴을 하였으나 문헌상의 만덕사가 이곳임을 밝히지 못했다.
그러나 스님은 만덕사지 주지 소명을 받은 이후 지금까지 고려 선찰 만덕사의 옛 모습을 재현해야겠다는 초발심을 잊어본 일이 없다. 불국사에서 황룡사 9층 목탑 재현의 서원을 세우듯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금정산 기슭에 고려의 국력을 동원하여 왕명으로 창건하였을 만덕사의 웅좌가 현신 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공초에 대한 그리움을 지울 수 없다.
'덧없는 나고 죽음의 바다여 / 일장춘몽 같은 허망함이여 / 이제 어디서 다시 만나랴 / 기약 없는 인생이여 / 초록 같은 인생이여 / 꿈에라도 다시 한 번 / 공초 선생님을 / 뵙고자 합니다'. ('연몽' 중에서)
법당 앞마당에 서서 낙토를 적시며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본다. 오늘의 강물은 어제의 강물이 아닌 것을, 덧없는 세월 속의 인생 회환을 낙동강에서 본다. 부처님께 귀의한 육십 성상이 저 강물 같은 것을. 스님의 시어가 말한다. 문의 011-840-4355
부산민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