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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불빛 아래 트롬본을 들고 무대에 서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는 뮤지션 박창규. |
- 고교 때 미8군서 연주하는 등
- 학창시절부터 화려한 경력 자랑
- 결혼 후 아이들 때문에 이민
- 잇단 사업 실패에 모진 생각도
- 결국 홀로 귀국해 연주에 몰두
- 이젠 가족들도 음악열정 응원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은 재즈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 커피전문점이나 대형서점, 백화점, 극장 로비 등 수많은 공공장소에서 재즈 선율이 흐른다. '재즈 아저씨'라 불리는 친근한 이미지로 일평생 재즈전도사를 자처한 루이 암스트롱을 우리는 잘 안다. 전 세계 음악팬들의 진한 사랑을 독차지한 그를 통해 재즈로 향한 귀가 열렸기 때문이다.
고교 1학년 때부터 미8군 전속악단과의 인연으로 일찍 재즈에 입문한 박창규(60) 씨를 '음악이 좋은 사람들'에서 만났다. 좁은 실내를 사분지 일이나 차지한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은 박창규 씨의 풍채가 당당하다. 트롬본과 피아노를 번갈아가며 신들린 듯 연주한다. 트롬본이 떫게 울며 '베사메무쵸'를 연주한다. 슬라이드(활주관)를 쥔 손이 요술을 부리면 트롬본이 토악질하며 운다.
1966년 봄, 중학교 1학년 때 서울 동대문 아이스하키 링크에 응원 갔다가 바로 옆에서 멋지게 연주하는 밴드부에 반했다. 경기는 뒷전이 되어 버렸고 슬라이드로 밀었다 당겼다 붕붕거리는 트롬본에 넋을 빼앗겼다. 다음 날 바로 밴드부에 입단했다. '급장이 딴따라 배운다니 이게 말이 될 소리냐'고 길길이 뛰는 담임교사의 조언은 들리지 않았다. 트롬본을 연주하기엔 팔이 턱없이 짧았지만 신이 나서 열심히 배웠다. 광성중을 졸업하고 당시 고교 밴드의 명문 배문고 밴드부에 합격한다. 타교 합격생 3명 중 한 명이었다.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 1969년 1학년 겨울방학이던 어느 날 선배들과 미8군 악단 연주회에 구경하러 갔다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연주자가 빈 자리에 선배에게 떠밀려 즉석 연주를 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단장이 "어! 이놈 봐라" 즉석에서 발탁돼 입단까지 하게 되고 하루 수당 800원을 받는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은 20원이었다.
악단장의 요청으로 학교장이 허락했기에 개학 후부턴 머리 기르고 밤마다 미8군 클럽에서 연주했다. 학교 밴드부와 미8군 20인조 밴드부를 겸하는 화려한 경력이다. 졸업앨범에도 친구들은 맨머리인데 박창규는 머리 기른 모습이다. 박창규는 아직도 그의 전성기를 배문고 밴드부 시절이라 얘기한다.
그 시절 그는 아메리칸 펙츄럴, 언더무드, 리틀브라운 잭 등 그린밀러악단의 음악들을 접하면서 전혀 몰랐던 음악 세계에 빠진다. 대학 진학마저 포기하고 음악을 택했다. 미8군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김종택(당시 KBS 경음악장) 악단에서 트롬본 주자로 활동했다. 충남 공주가 고향인 박창규는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와 남부민동에서 태어난 인연으로 부산을 좋아한다. 1973년 부산으로 와서 해운대관광호텔의 김호길 빅밴드 멤버가 된다. 그해 겨울에는 5인조로 출발하는 보컬 그룹 '부루막스' 트롬본 연주자가 되었고, '나는 못난이' '작별' 등으로 크게 성공한 서울의 '딕패밀리' 2집 앨범 제작에 참여한다.
22세 때 두 살 연하인 고교 선배 여동생의 친구를 소개받아 연주부터 듣게 하고 결혼한다. 음악을 사랑하게 된 아내는 항상 뮤지션 편이었다. 제대 후에도 부산에 정착하며 연주활동을 계속한다.
1980년 초량동의 기린피아노바에서 하얀 피아노를 치면서 트롬본 연주하던 3년간의 세월이 뮤지션으로서 최고로 주목받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988년 처와 두 아들과 함께 미국에 이민 간다. 뮤지션을 내팽개치고 미국행을 선택한 것은 밤무대의 악사인 아버지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반목질시를 더는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탁소 옷 다리기부터 닥치는 대로 일했다. 일식요리사 자격증을 따 대형 슈퍼마켓에 일식코너를 운영했다. 28곳에 점포를 확대해 잠도 줄이며 일에 천착했다. 1996년쯤에는 직원을 70명 정도 거느리는 등 제법 돈도 벌었다. 그러나 프락치들의 음식 소송에 휘말려 3년간 시달리다 보니 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또 한 번의 도전으로 슈퍼마켓을 운영하지만 이 또한 직원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하는 일마다 곤경에 빠져 한때 자살까지도 생각해 보았다. 철저하게 외톨이가 된 느낌이 되니 머리도 세어지고 시력도 나빠졌고 의욕도 상실됐다.
2005년 여름 더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트롬본 하나 달랑 들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식구들도 모르게. 김포공항에 내려 청담동 재즈카페 '마이웨이'를 시작으로 나훈아 악단에도 들어가 활약한다. 후에 소식이 닿은 부인이 찾아왔다.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음악을 하는 것이야말로 당신다운 일입니다. 음악을 계속하시지요."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뻤다. 장성한 두 아들은 미국 뉴욕주립대를 졸업, 미국에서 각각 성형외과, 정형외과 의사를 하고 있어 든든한 후원자이다. 레슨비 3만 원이 없어 서울대 음대를 포기해야 했던 서러움도 씻은 듯 사라졌다.
이후 부산 해운대 등지에서 뮤지션으로 활약하다 올해 7월 음악이 있어서 좋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에 자리를 틀었다. 오후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음악 속에서 산다. 돈 욕심이야 벌써 버렸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인 것이 좋을 뿐이다.
화려한 불빛 아래 트롬본을 들고 무대에 서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단다. 사람들은 음악 앞에 모여들게 마련이고 뮤지션은 박수 속에 산다. 박창규에게 음악 장르란 거추장스러운 용어일 뿐이다. 그는 재즈뮤지션도, 팝뮤지션도 아닌 스탠다드뮤지션이기 때문이다.
문의 010-8731-5320 /부산민학회장